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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등록일 2018-04-06 21:08 게재일 2018-04-0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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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봄, 새순. 산모가 아이를 낳듯 그렇게 나무는 힘겹게 새순을 틔우는 것이 아닐까. 새순이 툭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무는 힘겹게 새순을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닐까. 갓 태어난 갓난쟁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새순도 쭈글쭈글 구깃구깃한 것은 아닐까. 시작이 고통스러운 것은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4·3사건을 국가의 학살로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워, 4·3을 부정하고 여기에서 나아가 이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 이것은 죽은 자에게 또 그 때 죽지 못했거나 죽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일인가. 이토록 명백한 증거와 사실 속에서, 4·3일의 진실이 아프고 낯설게 터져 나오고 있다.
▲ 4월, 봄, 새순. 산모가 아이를 낳듯 그렇게 나무는 힘겹게 새순을 틔우는 것이 아닐까. 새순이 툭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무는 힘겹게 새순을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닐까. 갓 태어난 갓난쟁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새순도 쭈글쭈글 구깃구깃한 것은 아닐까. 시작이 고통스러운 것은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4·3사건을 국가의 학살로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워, 4·3을 부정하고 여기에서 나아가 이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 이것은 죽은 자에게 또 그 때 죽지 못했거나 죽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일인가. 이토록 명백한 증거와 사실 속에서, 4·3일의 진실이 아프고 낯설게 터져 나오고 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념식`에 참여한 대통령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중략…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의 제주에는 무슨 일이었을까? 여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1947년 `3·1절 유혈사태` 혹은 `3·1절 발포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사건은 착각과 오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3·1절 행사에 참여한 군중은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이 때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차이는 소란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경찰 당사자가 그냥 지나치려고 하자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를 지켜본 `응원 경찰`들은, 군중들이 경찰을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발포하게 된다. 결국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놀라운 사실은 부검 결과 희생자 1명만 빼고 나머지 모두 등 뒤에 총탄이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민심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이것을 착각과 오인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군중과 경찰은 격앙된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격앙된 태도를 낳았던 것일까. 경찰은 3·1기념 대회에 참여한 3만 여명의 군중이 좌익세력에 의해 동원된 불순세력으로 보았고 그런 이유로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한 `응원 경찰` 100명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순수한 의도로 3·1기념 대회에 참석한 군중은 무장한 경찰에게 적대감을 느꼈다. 군중을 불순분자로 바라보는 경찰과 그런 시선에 분노한 군중 간의 긴장감, 그 속에서 경찰이 탄 말이 아이를 찬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건 자체는 우연인지 모르나 그 사건을 일어나게 만든 상황은 이미 필연성을 내함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1년이 훌쩍 지나서까지 그 앙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경찰과 제주민 사이의 감정의 골은 더욱 커져만 간다. 왜냐하면 경찰은 사과를 요구하는 주민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과는커녕 발포의 정당성만을 강변해왔기 때문이다. 제주도민은 이에 항의하여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을 시작하였다.

파업 가담자 200명이 검거되었고 여기에는 경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업에 참여한 경찰관 66명을 파면하였고, 그 빈자리에 서북청년회 소속 단원을 충원하였다. 3월 1일 발포사건이 파견된 `응원 경찰`에 의한 것임을 고려할 때, 서북청년회 단원을 경찰로 임명하게 되면 지역주민의 반발이 더욱 커지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것을 용인했고, 제주주민과 서북청년회와의 대립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것은 1947년 3월의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의 종달리 사건과 같은 크고 작은 충돌로 발전하였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1947년 9월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제주 조직, 조선민족청년단 등을 발족시키면서 그 대립의 골을 더욱 키워갔다.

제주도의 흉흉한 민심에 편승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2월 무장투쟁을 결정하였고,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를 공격대상으로 지목하였다. 1948년 4월 3일, 300여 명의 무장 유격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사건은 확대되었다. 경비대의 토벌전은 4월 22일부터 시작되었고, 4월 28일 경비대와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그러나 제주읍 한 마을을 방화하는 `오라리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이후 4·3사건을 일으킨 무장대의 총책인 김달삼은 1948년 6월말에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빠져나갔으며, 후임 총책 이덕구는 1949년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학살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했다. 즉 `빨갱이 사냥`이라는 작전명을 붙였다. 이 작전은 차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벌여나갔는데, 한 시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빨갱이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 데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 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 날

한 무리의 정치깡패단이 열일곱도 안 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 날,바로 그 날

(이산하, `한라산` 부분, `녹두서평1`, 1987.3, 16~17면.)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4·3사건은 2000년 `제주 4·3특별법`이 공포되면서 그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는 3만 여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무장대의 최대 숫자는 500명이라 가정할 때 이것은 일종의 살육이라 볼 수밖에 없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제주 4·3사건은 여수에서 시작되어 순천으로 확대해간 여순사건(1948.10.19)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미군정은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증원군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육군사령부는 여수 신월리 제14연대 중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로당 소속의 군인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 등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펴며 명령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진압군`에서 `반란군`으로 변신하여 여수, 벌교, 보성, 고흥 등을 점령하였으며, 순천으로까지 진격하였다. 정부는 22일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작전을 시작하였다. 22일 순천, 27일에 여수를 점령하였으며, 진압과정에서 4·3사건과 같이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이러한 사건 6·25전쟁이라는 거대한 파국의 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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