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몇 차례 거절을 하다가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수행군관 황진 등을 통신사절단으로 보냈다. 그러나 1년 뒤인 1591년 3월에 돌아온 황윤길과 김성일은 서로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은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침략해올 것이라며 전쟁의 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조정의 실권을 잡고있던 동인인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조선을 침략할만한 인물이 못된다며 일본의 침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주장하자 선조는 통신사로 같이 다녀왔던 허성과 황진을 불러들였다.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의 말에 동의했고, 김성일의 수행원이었던 황진 역시 황윤길의 말에 동의했다. 이로써 3대1의 상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그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고 요란을 떨면 민심만 사나워진다는 이유로 동인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김성일은 전쟁 준비에 바쁜 일본을 둘러보고도 왜 그런 보고를 했을까. 역사는 당파싸움을 그 이유로 꼽았다. 나라의 안위를 위협한 반역행위였다. 조선 역사를 배우며 가장 개탄스러웠던 대목이었다. 그 이후 근대화로 국력을 키운 일본에 의해 일제식민지 치하에 들었던 이 나라가 해방된 후 남북으로 갈라진 데도 냉전체제로 인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이외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지도자들 사이의 이념갈등에 기인한 바가 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민족의 염원인 남북 평화통일로 가는 길은 참으로 거칠고 험난해 보인다. 진보정권의 햇볕정책과 유화정책이 반짝 남북관계를 밝힌 뒤 새롭게 정권을 잡은 보수정권은 대북강경책으로 다시 돌아섰다. 코너에 몰린 북한은 핵무장과 미사일도발이란 특유의 `벼랑끝 전술`로 맞섰다. 그랬던 북한이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한의 제안에 부응해 대표단과 선수단·응원단을 파견하는 등 남북 긴장완화와 비핵화논의에 호응하는 모양새를 보인 것은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7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대표 회동은 유독 뜨거웠다. 전날 북한을 다녀온 대북특사사절단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 비핵화 논의,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메시지 등을 챙겨온 경과 등을 듣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그동안 참석을 보이콧 했던 제1야당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처음 참석해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으면서 일순 토론장 분위기로 바뀌었다. 홍 대표는 정 안보실장이 3페이지 분량의 보고를 끝내자마자 “어느 쪽이 먼저 남북정상회담을 요구했느냐” “한미 훈련 무력화 및 지방선거용으로 4월 말 정상회담을 택하지 않았느냐” “9·19 합의 당시에는 핵 폐기 로드맵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북한이 불러준 대로 써온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참석자들 사이에서 “여기서 왜 취조하듯이 그러냐”는 반응이 나왔다. 특히 홍 대표가 “이번 정상회담이 북한의 시간벌기용 회담으로 판명된다면 정말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안이 있느냐”고 따져 묻자 문 대통령은 “홍 대표께서는 어떤 대안이 있느냐”고 맞받았고, 홍 대표가 “모든 정보를 총망라해 가진 대통령께서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되물으면서 언쟁이 벌어졌다. 홍 대표는 또 “북한 핵폐기가 아니라 핵 동결 및 탄도미사일 개발 잠정중단으로 가면 안 된다”고 지적하자 문 대통령은 “입구는 핵동결, 출구는 비핵화로 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북핵 해결을 위한 기본 입장을 다시 강조했다. 뜨거웠던 청와대 회동을 지켜보며 남북화해와 비핵화 논의를 통해 평화통일로 단 한 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면 모두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주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파적인 다툼은 국내 현안을 둘러싼 다툼으로도 충분하다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