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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경치`에 대해

등록일 2018-03-02 20:53 게재일 2018-03-0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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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물 위로는 얼마나 많은 바람이 흘러갔을까. 다시 그 바람이 흘러가는 사이 또 물은 얼마나 흘러내렸을까. 바람도, 물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흘러 사라진다. 우리의 삶과 죽음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저 물 위로는 얼마나 많은 바람이 흘러갔을까. 다시 그 바람이 흘러가는 사이 또 물은 얼마나 흘러내렸을까. 바람도, 물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흘러 사라진다. 우리의 삶과 죽음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람의 경치`의 내력

시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창문을 열어놓는 걸 좋아했다. 강의실로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왔었다. 복사를 해오는 법이 없는 선생님은 학생을 불러내어 설명할 시를 칠판에 쓰게 했다. 우리가 판서되고 있는 시를 노트에 옮기는 동안 선생님은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웠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땐 그랬다.

필기를 하다말고 라이터를 켜는 소리에 고개를 들면 선생님은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왜 이상한가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그냥 웃었는데, 그 말이 재밌었던 건지, 말투가 그랬던 건지, 담배를 피우는 모습 때문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참 말이 없다가 선생님은 문뜩 “저 바람은 어느 우주를 헤매고 이제 여기에 온 걸까요?” 질문도 아니고 혼잣말도 아닌 말을 던지고 또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바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건 아마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바람은 그냥 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바람도 어떤 사연을 갖고 있으리란 생각, 어떤 사연 속을 떠돌았을 거란 생각,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물론 우주에는 바람도 없고, 바람은 지구의 대기현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그런 바람이 지나온 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술렁였다. 바깥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 중엔 경치, 풍광, 풍경, 풍물, 경물, 산수…. 따위의 말들이 있다. 이 말들은 다 비슷한데 특히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경치나 풍경이다.

사전에서 `풍경`을 찾으면 그냥 밋밋하게 `[같은 말] 경치`라고 되어 있다. 풍경은 한자어를 풀면 그냥 경치가 아니다. 풍경의 풍은 바람이고, 경은 경치라는 뜻이니까, `바람의 경치`여야 한다. 바람이 지나가지 않은 경치는 있을 수 없다. 바람은 대기이므로 대기 없는 경치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경치란 말보단 풍경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풍경을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풍경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풍경 속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경치는 바람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풍경은 바람 없인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바람 없는 경치는 없다. 하지만 경치는 바람이 있다는 걸 느끼는 누군가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풍경은 바람 없인 존재할 수 없고, 또 그런 바람이 있다는 걸 느끼는 누군가 없이도 존재할 수 없다. 바람이 없다면 바람을 느낄 수 없겠지만,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 없다면 그 역시 바람을 느낄 수 없는 법이니까….경치 속을 다시 흐르는 바람이 있고, 또 그것을 느끼는 인간이 있는 풍경이라는 말이 그래서 좋다.

△“좀머 씨 이야기”와 바람

바람하면 떠오르는 글, `좀머 씨 이야기`. 흐릿하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이 책을 오늘 다시 펼쳐든다.

“오래 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이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적어도 거의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 내가 진짜로 그럴 각오를 하고 제대로 실행에만 옮겼더라면 실제로 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중략...) 그때 내가 바람을 뒤로 맞으며 학교 앞 동산의 초원을 가로질러 뛰어내려 왔을 때, 발을 조금만 힘차게 구르고, 팔을 양쪽으로 쭉 뻗기만 했더라도 내 몸은 바람을 타고 훨훨 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전혀 힘도 들이지 않고 2,3미터 높이로, 10 또는 12미터나 되도록 멀리 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까지 멀리도 아니었고,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큰 문제란 말인가! 어쨌든 나는 그때 날 수 있었고, 내가 만약 외투의 단추를 풀고 그것의 양끝을 양손으로 잡아 주기만 했더라면, 바람을 타고 둥둥 떠다닐 수 있어서 학교 앞 동산에서 언덕 아래에 있던 숲 위로 거침없이 훨훨 날아다니다가, 숲을 지나 우리 집이 있던 호숫가로 날아가서, 우리 집 정원 위에서 멋지게 한바퀴 선회하면, 날아다니기에는 이미 몸이 너무 무거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 테고, 다시 호수의 반대편 제방까지 날아가 점심 식사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 도착하기 위해서 마침내 우아한 몸짓으로 착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좀머 씨 이야기`, 5~6면)

조금 길게 인용했나보다. 이 소설의 `나`의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라는 저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좋다. 나는 저 주장에 거의 설득될 정도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외투의 양끝을 잡아주면 옷이 날개처럼 펼쳐질 테고, 땅에서 발을 세게 굴려 날아오르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바람에 몸만 맡기면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숲과 호수와 집과 정원을 마음껏 날아서 또 나중에는 우아한 몸짓으로 착륙도 가능할 것이다.

이런 상상은 늘 하고 있었는데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이런 글을 쓰지 않았더라만 내가 이런 글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아쉽다. 사실은 고맙다. 누구나 막연히 떠올렸을 법한 생각을 그가 이렇게 멋지게 써주어서 고맙다. 막연한 생각을 이토록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어서, 그래서 언제든 그의 책을 펼치고 이 부분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주어서, 바람에 날아가는 `나`를 떠올릴 수 있어서 정말 정말 고맙다.

△물 위에 바람이 흐르듯이

벌써 3년이 되었다. 나는 2015년 그 해 아주 특별한 연하장을 받았다. 여든하고도 몇이 더 되는 남정 선생님께서 친히 연하장을 보내주셨다. 거기에 쓴 시의 한 구절은 `물 위에 바람이/흐르듯이//내 가슴에 넘치는/차고 흰 구름`이었다. `청록집`49면에 실린 이 시의 제목은 `피리를 불면`이다. 왜 하필 이 구절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 연하장이 다섯 명에게 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정 선생님은 10연으로 된 이 시를 다섯 명에게 두 연씩 적어보냈다. 이 시는 센티멘탈한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연하장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은 이 시를 연로하신 선생님을 떠올리며 읽는 일은 버거웠다.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만리 구름길에 / 학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 젖은 풀잎//달빛도 푸른 채로 / 산을 넘는데

물 위에 바람이 / 흐르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어 / 피리를 불면//꽃비 꽃바람이 / 눈물에 어리어

바라 뵈는 자하산 / 열두 봉우리//싸리나무 새순 뜯는 / 사슴도 운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조지훈은 이 시를 통해 시우(詩友)였던 박목월, 박두진의 시들을 차용하여, 박두진을 학에, 박목월을 사슴에 비유하고 있다. 마흔 여덟에 타계한 조지훈은 스물 여덟에 이미 자기가 먼저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학이 울고, 사슴이 우는 상황,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남정 선생님은 한참이나 어렸던 우리를 친구처럼 생각하시며 이 시를 보냈던 것 같다. 이 연하장을 보내고 선생님은 이듬해 돌아가셨다. 선생님은 벌써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 위에 바람이 흐르`면 거기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늘 새로운 흔적이 생길 뿐이다. 남정 선생님은 바람이긴 하셨으나 우리의 마음 속에 잔잔하고 단단한 여운을 남기시고 떠났다. 오늘 다시 바람이 불고 물 위에는 바람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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