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 대형 지진이 발생하였다. 지진이라는 사상 초유의 재난에 직면한 사람들의 모습은 서로 다르면서도 같다. 성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뉴얼에 따라 책상 아래로 몸을 피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힘들게 계단을 걸어서 넓은 장소로 대피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생존배낭`을 꾸려서 아예 진앙지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로 떠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서 구호활동에 열중하는 사람도 있으니 재난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양면성이 있게 마련이지만 최근의 경험들은 양면성의 존재를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를 새삼 요구한다. 인간이 가진 양면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품, 즉 본성에 해당된다. 철학이 깊지 않은 필자가 함부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나 본성은 인간으로 성숙해 감에 따라 계발되거나 환경에 의해 변화되므로 `문화`와 `사회화`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어떤 일을 두고 두 가지 마음이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간 지점을 중용이라 하여 충돌하는 두 상황에서 취해야 될 정신으로 동양철학의 핵심이다. 어릴 때부터 중용의 도를 배우며 자랐지만, 현실에서는 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중용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며, 자칫 비겁함이 될 수 있으므로 매우 곤혹스럽다. 현명한 선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선택되지 못한 편에서도 수긍할 수 있는 솔로몬의 선택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포항예총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2017 포항예술인한마당`이 여느 행사와 마찬가지로 지진이라는 재난상황 때문에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예술 장르 간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물론 자기 분야를 더욱 돋보이게 하자는 선의임은 알지만 양자 간의 선택은 곤혹스런 일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역지사지`이다. 양면성은 일견 비겁함과 상통하는 면이 많아 보이지만 역지사지가 실천되었을 때는 굉장히 멋진 정신의 여유 공간이 된다. 갈등해결을 위하여 대승적 차원이란 말을 많이 쓰지만 막상 쉬운 일이 아니다. 대승적이란 큰 말보다 생존전략이라면 어떨지?
각박한 세상에서 생존은 여간 어려운 숙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양보, 배려 등의 미덕이 필요하다. 그것이 공생의 지혜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인간이 인간의 생존을 위하여 도시를 만들었지만 도시도 자연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자연 속에는 여러 가지 재앙이 도사리고 있으나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대로 자연과 화합하며 살아온 마사이족 아이들은 꿀잡이 새와 자연스레 대화한다. 숲에서 아이가 휘파람을 불면 꿀잡이 새가 나타나서 벌꿀이 있는 곳으로 아이들을 안내한다. 새들의 특이한 신호에 따라 벌집이 있음을 감지한 아이들은 연기를 피워 벌꿀 채취에 성공하고 유충을 새들의 먹이로 제공한다. 마사이족은 나눔을 신앙처럼 실천한다. 아름다운 공생이다. 하지만 벌의 입장에서 보면 사악한 무리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자연 이치 어디에도 양면성이 존재하며 생존에 정답은 없다.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수립하고 거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생존이라고 말하니 너무 절박한 느낌이다.
우리 예술인들이 꿈꾸는 좋은 환경을 만들고, 예술인의 지위향상을 위해서는 양보와 배려를 통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신분사회에서 `사농공상` 하였듯이 오늘날에도 직업이나 재력 등에 따른 암묵적인 서열이 엄존한다. 예술은 어디쯤인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예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인들 서로가 장르를 초월한 양보와 배려를 통한 아름다운 공생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