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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린다는 것

등록일 2017-08-25 20:59 게재일 2017-08-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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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나혜석, 최승자에 대해
▲ 용산역. 용산은 지도로 보면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의 배꼽과도 같다. 용산은 한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살기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용산은 전쟁과 관련을 맺기 시작했는데 그 역사는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교섭을 맺은 곳이자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군용철도를 증원하며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다시 해방이후부터 미군이 주둔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2009년을 기억해야 한다.
▲ 용산역. 용산은 지도로 보면 서울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의 배꼽과도 같다. 용산은 한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살기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용산은 전쟁과 관련을 맺기 시작했는데 그 역사는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교섭을 맺은 곳이자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군용철도를 증원하며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다시 해방이후부터 미군이 주둔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2009년을 기억해야 한다.

서울 용산구는 원효대교, 한강대교, 동작대교, 반포대교, 한남대교를 끼고 있다. 이렇게 많은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차도 없고, 운전면허는 있지만 장롱면허인 탓에 한강철교를 통해 용산으로 간다. 용산엔 남산도 있고, 이태원도 있고, 중앙박물관도 있다. 갈 곳도 많고 볼 곳도 많다. 그리고 이곳에는 한때 남일당 건물이 있던 “한강로 2가 63-70번지”가 있다. 이제 이 주소는 말끔히 지워지고 용산4구역 혹은 국제빌딩주변 제4구역으로 명기되고 있다. 2009년 1월 20일 이곳에서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 앞으로 용산참사 혹은 용산학살로도 불리게 될 이 사건에 대해 한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용산의 아침 작전은 서둘러 무리했고, 소방차 한 대 없이 무대비였습니다. 시너에 대한 정보 준비도 없어 무지하고, 좁은 데 병력을 밀어 넣어 무모했습니다. 용산에서 벌어진 컨테이너형 트로이 목마 기습작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졸속 그 자체였습니다. 법과 질서라는 목표에만 쫓긴 나머지 실행 프로그램이 없었고,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째 빠져 있었습니다.”(문화방송 `뉴스데스크`, 2009년 1월20일,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

망루를 불태운 유류의 유증기 성분이 세녹스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검찰은 “비슷한 물질이므로 시너라 부르겠다”고 했다. 세녹스는 망루의 전기와 난방에 필요한 발전기의 연료였고, 시너는 화염병의 재료였다. 뒤이어 검찰은 “화염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화염병이라고 보이므로 화재 책임은 철거민들에게 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세녹스를 시너로 바꿔 부른 이유는 세녹스를 `연료`가 아닌 화염병의 `재료`로 만들기 위한 속셈이었을 것이다. 2009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은 망루 생존 철거민 전원에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 난다.

세월이 흐르는 방향을 몰라 나는 더 위로 올라간다. 원효로와 청파동이 맞물리는 곳에는 용산경찰서가 있다. 이곳은 한 때 서울시립자제원이었던 곳이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서 수업하였다. 3·1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고, 그의 변호를 맡아주었던 김우영과 1920년 결혼하였다. 1921년에는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것은 나혜석에게도 처음이었지만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이기도 했다. 1927년 김우영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였고, 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1930년 이혼한다. 그녀는 1934년 잡지`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기고하였다. “조선남성 심사는 이상 하외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남성중심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적 지탄과 조롱이었다. 나혜석은 그런 모멸을 몸으로 견뎠다.

이렇게 한 많은 그녀의 삶을 뒤로하고 더 올라가면 숙명여대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청파동이 시작된다. 청파동은 용산구의 북쪽에 위치한 동으로 푸른 야산이 많았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청파역(靑坡驛)으로 불렸는데, 교통과 통신 기관인 역참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4년 한성부의 용산방 중에서 청파계(靑坡契)로 분류되었고, 1914년에는 청엽정(靑葉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6년에 청파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지만, 1981년 이 지명은 오직 한 시인의 전유물이 되었다.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

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의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전문)

때로 평론가의 도움을 받을 때 더 잘 읽히는 시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시는 시를 설명하는 말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시도 있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는 그런 시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말한다는 것은 무모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시는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짐, 그로 인한 아픔을 아리게 새겨놓고 있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다는 것은 헤어지기 전 `너`가 `나`에게 보여준 태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아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의 헤어짐을 승인할 수 없다. `너`의 태도가 헤어질 때보다 더 모멸적으로 바뀌었을지라도 `너`에게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다니? 죽은 자가 다시 죽을 수 없듯이 `최후`가 `다시 한 번` 반복될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그런 `최후`를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그것은 어떤 `최후`도 `최후`가 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너`가 아무리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더라도 그 고통이 만남에 대한 갈망을 분쇄할 수 없을 것이며, `나`를 떠난 `너`를 아무리 만나도 만남에 대한 갈망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최후”일 밖에. “몇 세기 전의 겨울”부터 `나`는 그런 `최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 시는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겹쳐놓고 있다.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 내가 빈 벌판을 해맬 때”라는 시구 속에서 세상에게 버림받은 채 병든 몸을 이끌고 떠돌아야 했던 나혜석을 본다.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는 시구에서 망루에서 불타 죽은 저 영혼들이 법정에서 다시 한 번 더 죄인으로 지목받으며 오래도록 죽어가야 하는 저들의 (곧 우리의) 삶을 보게 된다. 죽지 않는 죽음이 2014년 4월 16일과 함께 끝나지 않은 채 다시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나`의 절규를 넘어 지나간 삶과 다가올 역사에 대한 애도다.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과거에서 온 시간과 미래에서 온 시간이 만나는 지점, 그리하여 흘러가는 미래와 멀어지는 과거 사이에 놓인 현재는 끝없이 출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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