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대구 최초의 서양화전 `대구미술전람회`

등록일 2017-05-17 02:01 게재일 2017-05-17 18면
스크랩버튼
▲ 김태곤<br /><br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서양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지도 벌써 100년이 넘었다.

우리 전통의 미의식과 표현양식에서 서구의 미적 가치를 수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것 이상의 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대구는 서울이 아닌 일본에서 직접 서양화를 배우고 익힌 대구출신 화가들에 의해 보급되고 미술단체가 자의적으로 결성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결과 대구는 서울, 평양과 함께 우리나라 서양화의 메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서구문화를 대표하는 서양미술이 대구의 화가들에 의해 본격화 되면서 대구는 어느 도시보다 활발한 예술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100여 년 전에 대구미술은 어떤 환경 속에서 수용과 전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경향과 유작들에 대한 소재 파악은 아직까지 한국미술사에서 연구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1920년대 초 대구서화들로 결성된 `교남시서화연구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며 대구 근대미술의 새로운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1922년 5월 대구부청(당시 경상북도청) 내 위치했던 뇌경관(賴慶館)에서 개최된 `교남시서화연구회전`은 대구 전통서화의 현주소와 발전 가능성을 한눈에 보여준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대구의 청년 지도자인 이여성, 정운해, 서건호, 서병인 등이 마련한`대구미술전람회`가 열려 대구미술의 본격적인 발표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이 전시는 대구미술을 일반인들에게 선보인 대구 최초의 서양화 작품전이었다. 서성정에 위치해 있던 노동공제회관(옛 은사관)에서 열린 당시 전시회는 새로운 미술양식을 감상하며 배우기 위한 관람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대구미술전람회는 지난 11일부터 노동공제회관(動共濟會館) 안에서 열렸는 바, 이는 적어도 남국(南國) 정조(情調)와 풍토를 가진 곳에서 처음 표현되는 예술(藝術)의 빛이다. 회장은 무료 공개인 바 입장인 수는 매일 오육백명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어 좁은 공제회관이 더욱 복잡하게 된 바 출품점수는 서양화부에는 이여성(李如星)군의 유우(乳牛)외 십육점, 이상정(李相定)군의 `지나사원`외 십삼점, 황윤수(黃允守)군의 `봄비 온 뒤`외 오점, 박명조(朴命祚)군의 초추(初秋)외 오점, 합 사십삼점인 바 눈뜨이는 가작이 의외로 많아서 대구에 이만한 미술가가 있었는지를 의심할 정도였고 동양화부의 출품은 사십점인 바 서석재(徐石齋)의 난초 서경재(徐敬齋)의 매화 서태당(徐兌堂)의 대 박회산(朴晦山)의 글씨 허기석(許箕石)의 산수가 그 중 호평이었으며, 고서화부 출품은 삼십여점인 바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추사 김정희·미수 허목의 친필과 최소동육세서(崔小東六歲書)와 휴휴당, 임사당의 화이며 조월파(趙月波)의 금강산 사생 등이었더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고어로 기록된 신문에서는 당시 관람객들이 신문화인 미술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매일 600여 명의 관람객들은 서구의 미의식과 표현양식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하에 우리민족이 가져야 하는 진정한 교육의 의미와 세계화에 대한 당위성을 새롭게 인식했을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와 합리적인 수용이 결국 대구를 서양미술의 중심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이제 대구·경북은 100여 년 전 문화예술의 선각자들이 펼쳤던 열정과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본받고 새로운 100년을 펼쳐 나갈 능동적 자세를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아침산책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