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대구의 약전골목에서 의미 있는 행사가 마련됐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과 다양한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잘 알려진 교남 YMCA회관이 오랜 공사를 통해 3·1운동 기념관과 YMCA 역사관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교남 YMCA회관은 1914년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가 청년전도를 위해 세운 건물로 대구 약전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2층의 붉은 벽돌 건물로 1층과 2층 사이를 돌림띠(cornice)로 장식하고 창호 상부는 아치로 인방을 확보하여 사각형의 창문을 설치하는 등 1910~20년대 조적조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3·1독립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 공간이며 물산장려운동과 기독교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이기도 하며 다양한 미술전람회가 개최된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구 근대 역사의 중요한 사건과 사연을 간직하고 있던 이곳에 대한 지역의 무관심과 행정기관의 관리소홀이 그동안 건물을 흉물처럼 방치해 두는 결과를 낳게 했다. 늦은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교남 YMCA회관의 복원은 대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고스란히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할 일이다.
먼저 이 건물은 대구근대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두 개의 대표 콘텐츠로 나누어 꾸며진다.
대구 근대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마련된 3·1운동 기념관은 교남기독교청년회 창립발기인 중 1919년 당시 3·1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만집,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7명의 애국지사에 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다.
YMCA 역사관은 나라를 위해 투쟁하고 기독교 선교활동을 벌였던 YMCA사무총장과 이사장, 임원 등 20명에 대한 기록과 유품을 함께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진다.
교남 YMCA회관이 가지는 대구 근대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일제강점기 격동과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지역사회계몽과 청년 교육활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서구문물들이 유입되며 절대적 파급효과를 나타내던 서양화의 보급과 활동은 대구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인 박명조 작품전 개최로 이어진다.
1926년 당시 20세의 젊은 나이로 마련한 그의 개인전은 지역미술계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서양화 보급을 통한 신교육이 주는 자주적이고 개화된 의식의 전환을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청년화가 박명조의 개인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평양의 김관호의 개인전 보다는 10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인 서울의 나혜석 개인전 보다는 불과 5년이 경과한 후 마련된 전시회로 상징적 의미는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화가 박명조는 17세의 어린나이에도 석재 서병오와 이상정, 이여성 등 대구의 중진작가들과 함께 대구미술전람회(1923)에 출품해 그림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화가들과 빈번한 교류로 인해 자토회 정기전에 찬조출품 하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제5회 조선미전(1926)을 시작으로 제14회 조선미전까지 지속적인 출품을 통해 중앙화단에 그의 이름을 알려나가기도 했다.
현재 유족이 보관중인 그의 첫 개인전 기념사진에서는 전시 포스터를 배경으로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청년작가의 순수함과 비장함 속에서 빼앗긴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