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 책가방이 빨리 학교 가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아빠, 진짜로 나 언제 학교 가?” 4년 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경이가 말버릇처럼 한 말이다. 학교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학 일주일 남겨놓고는 아예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안고 잠 잘 정도였다. 그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그런데 그토록 학교를 좋아하던 딸아이가 이젠 투덜이가 됐다. 월요일 아침 등교하면서 말한다. “아빠, 언제 토요일이 와?” 일요일 점심이 지나면 알람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 오늘이 토요일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아빠, 너무 힘들고 피곤해”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를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지, 그토록 학교를 가고 싶어 하던 아이가 이제 학교 말만 나오면 피로감부터 느끼는지, 누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처럼 사교육을 몇 개씩 받는 것도 아니다.
자유학기제다 뭐다 해서 세상에서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학교가 뭔가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 교육 주체인 학생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 수요자 의견을 최대한 반영했다는 교육 당국자의 뻔뻔한 거짓말에 속을 사람들은 분명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지적하고 바로 잡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퇴보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첨단 시대를 주도할, 이 사회 변화의 방향을 제시할 학교는 정녕 이 나라에서는 불가능할까?
이런 말을 하면 교육 당국자들은 펄쩍 뛴다. 그리고 되묻는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이 나라 교육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아느냐고. 지금 학생들은 교육 낙원에서 열심히 자신의 꿈을 찾고 있다고. 그리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동안 실패한 교육정책들과 정체 모를 통계 수치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들 업적인 양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학생들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사 점수를 높이는 마루타 정책들이었다는 것을 안다.
신학기, 분명 4년 전 나경이와 같은 마음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그 학생들만이라도 부디 입학 전에 가졌던 행복한 설렘과 희망, 그리고 기대를 학창 시절이 다 끝나도 그대로 간직하기를 바랄 뿐이다. 과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답이 없을까.
필자는 학기 초만 되면 유독 생각나는 이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로렌츠(Lorenz)의 `각인(刻印, Imprinting)` 이론이다.
각인 학습 이론이란 회색기러기 새끼들이 부화한 직후 그들을 낳았거나 기른 부모를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이론이다. 다음은 각인 이론의 탄생 배경이다.
“어느 날 그는 회색기러기 새끼가 막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광경을 목격한다. 알에서 나온 꼬마 새가 느닷없이 그에게 `인사`를 하더니, 그때부터 한시도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 새끼 새를 어미의 품속에 머물러 있게 하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작은 회색기러기는 로렌츠가 어디를 가든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이 새를 양녀로 받아들였고 `마티나`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어쩌면 모든 신입생들이 마티나일지도 모른다. 학교에 대해 갓 눈 뜬 마티나! 각인 이론대로라면 그들이 학교에서 처음 보는 많은 것들은 그들에게 그대로 각인된다. 과연 우리 아이들은 마티나처럼 그들이 처음 본 선생님을 부모처럼 믿고 따를 수 있을지? 그리고 또 선생님들은 편견 없이 그들을 친자식 이상으로 보살펴 줄지?
그런데 벌써부터 신입생들의 한숨 소리가 웃음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촛불과 태극기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희망해본다. 우리 마티나들이 행복한 학교에서 아름다운 비행을 위한 준비를 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