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지금의 촛불시국을 바라보니 2년 전 흥행을 이룬 영화 `변호인`이 생각난다.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부림사건`은 실화로 5공화국시절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변호인이며 돈도 권력도 없고 가방끈도 짧은 그리고 돈만 밝히는 듯한 느낌의 속물변호사가 국밥집 아들과의 인연으로 법정에서의 정의롭고 흔들리지 않는 인권변호사로서의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게 대충 줄거리다.
국가경영의 기반을 인치로 하느냐 법치로 하느냐는 오래전부터 숙제로 남아 지금에 이르지만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개 법치를 근간으로 국가를 경영한다. 국가의 법이 힘 약한 국민들을 지켜주지 못할 때나 사회에서 발생되는 크고 작은 모든 갈등의 해결과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결해주는 법조인이 바로 변호사이다. 이렇듯 변호인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좋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법의 허점을 이용해 범죄행위를 피하는 유일한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조선왕조 성종실록(9년)의 변호인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무뢰배가 송정(訟庭)에 와 오래 버티고 있으면서 혹은 품을 받고 대신 송사(訟事)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부추겨 송사를 일으키게 해 글재주를 부려 법을 우롱하며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어지럽게 하니, 이들을 외지부(外知部)라 한다. 쟁송이 빈번해지는 것이 실로 이 무리 때문이니 마땅히 엄하게 징계하여 간교하고 거짓된 짓을 못하게 하라.` 지금처럼 변호사 자격증을 가지고 정식 변론을 하는 행위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소송을 대신해 법조문을 거론하여 유리하게 이끌며 승소하면 그 대가를 받는 사람들, 조선에서는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을 외지부라 불렀다.
`외지부`란 밖에 있는 지부라는 뜻인데, 원래 이 명칭은 장례원을 도관지부(都官知部)라고 지칭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중종실록(5년)에 장례원은 노비 문서와 노비 관련 소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사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부는 토지와 노비의 양에 달렸으므로 당시에 이 관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데 장례원에 속한 관원도 아닌 일반인이 법률을 암송하며 문서를 위조해서 송사하는 자를 교사하고 송사에서 이기면 자기가 그 이익을 취했기 때문에 이들을 장례원 밖에 있는 지부라 하여 외지부로 불렀던 것이다.
성종 이후에도 외지부들이 모두 근절되지 못하여 연산군일기(8년)에도 외지부 16인을 변방으로 내치라는 명령이 보이고, 외지부를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1명당 면포 50필로 포상하고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장 100대로 처벌하겠다고 결정한 것을 보면, 이후에도 외지부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지부가 오히려 권력과 결탁한 사례는 중종 때 왕실에 속한 인물들이 외지부와 결탁하여 송사를 일으키고 이익을 도모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중종실록(14년)에 `경명군 이침은 외지부를 끌어다 자기 집에 모아 놓고 송사하기를 좋아하니 심히 좋은 일이 못 됩니다`라는 기록이나 `사천수 이호원은 해마다 수교를 능히 꿰뚫어 외고 있으므로 비리로 송사하기를 좋아하여 외지부 노릇을 합니다` 라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 이침은 성종의 아들이고 이호원은 태종의 증손이니 다 종실인 셈이다. 이는 외지부가 권력과 결탁한 부정적 측면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리사회 혼란은 대통령이 국가경영을 외부인의 인치에 내맡겨 농단당하고 탄핵까지 이르자 법치의 틀로 포장해 변호인단을 통해 그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참된 변호인은 범죄의 행위를 궤변으로 감추거나 법망에서 빠져나가는 묘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호소하여 진실을 말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을 새롭게 다짐하도록 역할을 해줘야 한다. 영화 변호인의 명대사가 떠오르는 시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