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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백의종군

등록일 2016-12-09 02:01 게재일 2016-12-0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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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백의종군은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간다는 말이다. 관원에 대한 처벌로서 백의종군은 남북조시대의 흰옷을 입은 채로 직무를 수행한다는 백의영직(白衣領職)에서 유래했다. 본디 문·무관 공히 적용되는 처벌로 무관의 경우는 자연히 백의종군이 된다. 최초 사례는 중국의 동진시대 도연명의 증조부 도간이다. 도간은 반란군에게 패하여 해임됐으나 왕돈의 요청으로 백의영직 후 재기의 기회를 얻어 마침내 반란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또 다른 사례는 당(唐)의 장수 유인궤이다. 당의 고종이 처음 요동정벌에 나섰을 때 군량 수송을 담당하던 유인궤는 군량을 실은 배가 침몰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자 고종은 그를 처형 대신 백의종군을 명하였고, 목숨을 건진 유인궤는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또 다른 사례는 성당시대의 안록산이다. 장수인 그는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처형당할 위기에서 그의 용맹을 아낀 현종이 처형 대신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그러나 현종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안록산은 훗날 반란을 일으켜 현종을 궁지에 몰아넣고 당을 망하게 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있는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597년 5월 조선군을 통솔하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의 참모 박성(1549~1606)이 선조에게 올린 `시폐를 논하는 상소`가 대암집(大菴集)에 실려 있다. 내용인즉 `지난 계미년(1583·선조16), 북쪽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당시 대신은 식견이 좁고 해이해 공을 탐내다가 패전한 자에게 관대한 법을 적용해 함부로 군법을 흔들었습니다. 이른바 백의종군해 공을 세워 속죄한다는 것이 여기서 시작되어 이로부터 정해진 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중략)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으며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식자들은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워 속죄한다는 말이 장수와 병사들이 도망치는 길을 열었다고 여깁니다.` 백의종군으로 인한 폐단을 올린 상소문이다.

죄를 지은 장수를 처형 대신 속죄할 기회를 주는 처분이 백의종군이니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으면 도망치는 것이 최선책으로 여겨 니탕개의 난(1583) 이래 백의종군이 관례가 됐다. 그 결과로 장수와 병사들이 적을 만나면 싸울 생각은 않고 먼저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는 것이다. 당시 백의종군 처분을 받으면 병졸로 전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장수의 능력이 아까워 처벌만 면하고 그대로 전쟁터로 나갔다. 병졸이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으니 강등보다는 일종의 경고로 처벌 대신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특별사면에 가깝다. 조선에서 두 번씩이나 백의종군을 경험한 장수는 그 유명한 이순신이다. 첫 번째는 1587년 조산만호 책임자였던 시절 여진족과의 녹둔도 전투에서 대패 후 선조의 명으로 백의종군된다. 이순신 역시 니탕개의 난 이후 관례화된 백의종군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두 번째는 1597년 통제사시절 왜장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넌다는 첩보를 무시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압송되나 간신히 처형을 모면한 그에게 다시 백의종군의 처분이 내려진다. 원균이 전사한 뒤 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명량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처럼 백의종군은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영웅서사시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대선 때면 유독 대선주자들이 많다보니 백의종군하는 사례도 많다. 유력 대선주자였던 전직 여당 대표가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출마할 기회가 아님을 알고 백의종군한 정치인은 그나마 양심적이다. 전 야당 대표는 지난 4·13총선 때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당직까지 내놓고 물러났다가 당시의 공약은 전략적이란 궤변으로 얼버무린 뒤 슬그머니 정치판에 끼어들어 대통령 행세까지 하고 있다.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하는 백의종군도 나올 것이다. 이러한 행위 모두가 백의종군이 정치생명 연장을 위한 명분으로 악용되고 있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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