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인물이 태어난 시대의 무대를 장식하며 명멸해갔지만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에 극적인 삶을 살다간 걸쭉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허균(1569~1618)이다. 허균은 선조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다. 수많은 학자들이 당쟁으로 사화(士禍)를 입어 사라졌으나 허균처럼 산 인물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당시의 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18년 역적혐의를 받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과 당대의 자료는 하나같이 허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으며 `천지 사이의 괴물`로 까지 표현하였다.
이식(1584~1647)의 문집인 `택당집`은 허균에 대한 기록 이외에도 16~17세기에 활약한 주요 인물의 행적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인물 평가에 대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자료이다. 12세부터 편모슬하에서 서자(庶子)라는 신분상의 사회적 제약을 넘지 못하고 뜻을 펼치지 못하자 당시 사회가 안고 있던 제반문제를 `홍길동전`이라는 소설을 통해 과감하게 폭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바꿀 힘이 없기에 초능력을 지닌 영웅을 출현시킴으로 그가 지향했던 꿈이 구체화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사회는 밖으로는 임진왜란으로 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안으로는 당쟁이 격화되어가는 시점이었다. 허균은 유재론(遺才論)이나 호민론(豪民論)과 같은 글을 통해 신분이나 배경보다는 능력 있는 인재의 등용을 줄곧 주장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 의지가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의 창작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중 민중 지향적 사상이 대표적으로 함축된 것이 호민론이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 할 바는 백성뿐`이라고 전제한 후 백성들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항상 눈앞의 일들에 얽매이고 그냥 따라서 법이나 지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백성들 즉, 무식하고 천하여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항민(恒民), 끝없는 수탈에 모질게 빼앗기고 수입을 다 바쳐서 제공하느라 시름과 탄식을 하면서 윗사람을 탓하는 백성 즉, 정치가로부터 피해를 입고 원망만 하지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지금의 나약한 지식인을 일컫는 원민(怨民), 참모습을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 천지간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의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호민(豪民)으로 분류하였다.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들이 합세하여 부패하고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 호민론이다. 또한 국왕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백성의 위대한 힘을 자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당시 군주제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기도 했는데, 당시 명나라에도 막 천주교가 도입된 시점임을 고려하면 허균의 신학문에 대한 수용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유불선에 능통하면서 학문과 사상에 대해 개방성을 소유했던 학자 허균에게는 주자성리학의 울타리 속에 지식인을 가두어 놓고 체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 조선사회는 너무 좁았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지성과 도덕과 염치가 상실됐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에게 국민 개개인이 쥐어 준 권력이 지도자를 축으로 주변 인물들에 의해 사사로이 마구 행사되어 국정까지 농단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6세기 허균의 호민론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 혼란한 시국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만큼의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와 닿는 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