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도 분명 격(格)이 있다. 하지만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이 나라엔 예의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이 나라엔 오로지 본능, 그것도 동물적인 본능만 존재한다. 본능에 충실한 삶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서 이성을 앗아 갔다. 이성이 상실된 사회는 오로지 극단만 존재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비판이 있을 수 없다. 비판은 없고 비난만, 그것도 극단적인 비난만 판을 치는 이 사회가 너무 부끄럽다. 모든 것이 극으로 치닫는 대한민국이 너무 위태롭다.
학생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밝은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것이 교사의 도리지만 필자는 학생들에게 그런 거짓말은 못하겠다. 정말 어둠도 이런 칠흑 같은 어둠이 없다. 분명 지금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기(暗黑期) 중에서 최악의 암흑기이다. 어쩌면 일제 암흑기보다 더 지독하다. 그 때는 광복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죽을 고통을 이겨냈지만, 지금은 그런 목표조차 없다.
필자는 우연하게 시장에 갔다가 의미심장한 시장 담화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의 등대 같은 이야기를 잠시 인용해본다. “가마솥 밥 대신 냄비 밥을 먹어서 그런지 왜 사람들이 냄비를 닮아 가는지 모르것다. 모든 것이 냄비다. 그냥 조그마한 불에도 달그락거리는 냄비! 정말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 뭐가 진득한 것이 있어야지 저거는 뭐 그렇게 잘 했노. 저거는 잘 못한 게 없나. 다 저거 꿍꿍이 속 채우려고 하는 것인지 모를 줄 아나.”
필자 역시 냄비 밥을 먹고 자란 냄비 인간이어서 그런지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생각해보면 이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것 중 냄비가 아닌 것이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냄비다, 그것도 양은 냄비! 냄비 언론, 냄비 포털사이트, 냄비 국회, 냄비 정치, 냄비 국가. 냄비 근성을 검색하다 재미난 말을 발견했다. 캔티즌! 캔티즌은 깡통을 뜻하는 `캔`에 `네티즌`이라는 단어가 붙어 만들어진 신조어다. 캔티즌을 직역하면 `깡통네티즌`이 되는데, 이는 일부 개념 없고 생각 없는 네티즌들을 `깡통`에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캔티즌을 어느 사이트에서는 `소신도, 주관도 없이 군중심리에 의해 쉽게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을 가진 네티즌`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이 말을 보는 순간 할아버지의 말씀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캔티즌에겐 배려, 이해, 기다림, 예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들에겐 오로지 즉흥적인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들을 부추기는 것은 바로 냄비 언론과 냄비 포털사이트들이다. 캔티즌이 늘어나면서 그들도 더 자극적으로 변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실시간 검색 순위`다. 캔티즌들과 냄비 포털사이트들은 `실시간 검색 순위` 등과 같은 자극적인 방법을 이용해 국민들을 극단적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 의해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암흑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장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한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한다면 과연 이 나라에서 일할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노. 아버지가 잘못을 하면 그럼 아버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나?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줘야 할 거 아이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물러나면 누가 해결 하노. 거국내각, 웃기지 마라 해라. 다 똑같은 것들인데,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라고 해라.”
과격하고 극단적인 밀어붙이기가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2009년 5월에 경험했다. “結者解之 其始者 當任其終 (결자해지 기시자 당임기종 - 맺은 사람이 풀고, 처음 시작한 사람이 그 끝을 책임져야 한다.)”라는 말을 모두 잘 알 것이다. 암흑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론과 포털사이트 운영자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제발 단어 좀 가려 씁시다. 그리고 대통령을 비롯해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좀 지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