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께서 십만 군대로 동방에 원정오니 천둥 같은 기세에다 범처럼 용맹했네.(중략) 우리 임금 복종하여 다 함께 귀순하니 위엄 때문 아니요 덕에 귀의한 것이라네.(중략) 우뚝한 비석이 한강 가에 서 있으니 만년토록 조선 땅에 황제의 덕 빛나리라.”
이 글은 이경석(1595~1671)이 지은 대청황제공덕비문(大淸皇帝功德碑文)이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나루에 주둔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며 항복했다. 청 태종은 왕자들과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를 포로로 잡아가면서 항복을 받은 자리에 전승을 기념하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우게 했으니 바로 이 비석이다.
하지만 이 비석을 누구도 대청황제공덕비라 부르지 않고 건립 당시부터 후대의 각종 문헌에 이르기까지 비석이 있는 삼전나루의 이름을 따서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렀다. 그만큼 우리민족에게는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은 치욕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당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은 이상 그들이 원하는 이 치욕의 비문을 누군가는 지어야 했다. 이 역사의 오명을 짊어지는 일을 인조는 1637년 11월에 비문을 지을 사람을 추천하라고 비변사에 명을 내렸다.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 등 네 명의 명단이 올라왔으나 장유는 모친상을 이유로 사양했고, 다른 이들도 각자 나름의 이유를 댔으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후 고령인 이경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비문을 지어 올렸다. 그 가운데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조잡하게 써서 일차로 탈락했고,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비문은 청나라에 보내져 최종적으로 이경석의 비문이 채택되었다.
비석의 크기 역시 조선에서 준비한 것은 묵살되고 청나라에서 요구하는 크기로 변경되어 비신 12척에 용두 2척 2촌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비문은 세 가지 문자로 기록하였다. 정면은 청나라 문자와 몽고 문자이고 후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의 글씨는 당시 형조 참판인 오준이 쓰고, 비문 위에 전서로 쓴 `대청황제공덕비`란 글씨 일곱 자는 여이징이 썼다. 이렇게 새긴 다음 비면의 `황제 자는 황금빛 니금(泥金)을 입히고 나머지 글자는 주홍색으로 칠을 하여 1639년 12월 8일에 모든 공역을 완료했다. 그 후로 청나라 사신은 조선에 올 때마다 한강을 건너가 이 비석과 남한산성을 둘러보며 조선의 종주국임을 과시했다.
이 비는 1895년 조선이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면서 땅속에 묻히게 되나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광복 후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또다시 땅속에 묻혔다. 1963년 대홍수로 인해 다시 땅 위로 드러나 인근의 빈터로 이전을 거듭하다 2010년에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현재의 석촌호수 서호언덕에 서있다. 이곳으로 옮기기 전에는 비석 곁에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린 부조물(1982년 김창희 조각)이 있고 그 아래에는 동판에다 병자호란 당시의 내력을 적어 놓았다. 그 마지막 구절은 `수난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이 같은 오욕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민족의 자존을 드높이고 자주, 자강의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으나 아쉽게도 이 부조물은 함께 오지 못했다.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고 싶은 마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을 때는 부정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삼전도비 역시 지난 시대의 굴욕적인 역사적 상황을 상상하게 해주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내년 대선을 목표로 한 주자들이나 모든 정치인들은 물론 국민들도 한번쯤은 찾아 나라에 대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징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지금의 상황이 영원히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