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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과 덕혜옹주

등록일 2016-10-14 02:01 게재일 2016-10-1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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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명량해전은 선조 1597년 임진왜란 후 조선을 재침략한 왜적과의 해상전투이고, 덕혜옹주는 300년 후 고종의 후궁 딸로 일본에게 나라를 침탈당한 망국시대의 옹주다.

근래 조선시대가 배경이 된 영화가 65편, 일제강점기 소재가 22편 정도 된다.(위키피디아) 이런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는 항상 역사왜곡이란 논란을 일으킨다. 그 이유는 역사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특정사건이나 등장인물의 진위여부가 아닌 역사에 대한 작가의 역사의식 때문이며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합성어인 팩션(faction)이 이러한 진실의 왜곡이란 비판에 맞서는 방패가 됐다. 허나 이 팩션이 역사소비 현상에 적절한 방어막이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며 역사를 소설에서 문자로 재현하는 작업, 또는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명량`은 절제된 스토리와 대사를 통해 주제전달을 명확히 하고 잘 짜여진 구성을 하고 있는 영화로 기득권자와 권력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과 충돌양상이 보여준 판타지성에 기인한다. 즉 아웃사이더인 이순신과 백성들의 수평적 연대를 통해 당시 기득권자인 왜적과 조선의 국가권력을 동시에 패퇴시킨 전쟁이다. `명량`은 역사왜곡과 해석의 경계지점에서 해석이라는 부분 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 사극이라 보면 되겠다. 실제 난중일기에는 대장선에서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 명량 전체 피해는 사망 7명, 부상 27명으로 돼있다. 결론적으로 `명량`은 화려한 해상 전투장면으로 승부를 건 상업영화 이상의 현대적 시대정신을 읽어낸 역사극이며 왜곡 측면에서 선상백병전을 제외하면 전공(戰功)은 오히려 실제보다 축소된 영화라 볼 수 있다.

`덕혜옹주`는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과연 어디까지가 적정한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이완용이 을사조약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 고종이 아프다는 핑계로 가장 신뢰하던 충신 이완용을 내세워 진행하였고, 그 보상으로 이완용은 학부대신에서 특진하고 훈장까지 친히 하사받는다. 고종과 생모 귀인 양씨는 덕혜옹주를 네 살부터 덕수궁에 설립한 일본유치원과 일본인 가정교사, 소학교 2학년부터 일본인 귀족학교인 `일출소학교`에 편입시켜 가르쳤다. 상궁 김명길이 쓴 `낙선재 주변`이란 책에 “덕혜옹주는 게다를 신고 하오리를 걸치고 통학하셨다. 집에선 학교에서 배운 노래라며 `호타루 찬가` 등을 부르시곤 했는데 그 모습이 일본 아이들과 똑같아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옹주의 실제생활은 애국심이나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학에는 `의심증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음습하다고 믿거나 역사의 대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원인과 불공평한 결과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몰락한 제국의 옹주를 독립운동과 연결시켜냄으로 비극성을 고취하는 것은 역사학에서 말하는 그런 `의심증의 오류`와 관련 있는 허구에 종속되어진 시선일 것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제작자들이 의심의 오류를 최대한 활용하여 역사해석을 함으로서 상업성을 목적으로 `장사 잘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돼야 하는 것이지 거짓으로 다시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비록 부끄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정직하게 바로 보아야 한다. 무능한 지도자와 지배계층의 당쟁, 권력의 향락과 퇴폐는 곧 국가의 환란과 망국으로 이어진다는 진실은 허구로 만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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