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획 시리즈 옛 포항역 개발과 구도심 활성화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간이역으로 문을 열어 101년 역사(歷史)를 끝으로 포항시민들과 작별을 고한 옛 포항역 역사(驛舍) 부지활용을 놓고 지역민들의 관심이 뜨겁다. 포항역은 구도심의 심장부에 위치해 시가지와 시너지효과를 내며 수십년간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으나 상권이동과 주변지역 낙후 등으로 점차 쇠퇴하면서 폐역 이전인 10여년 전부터 침체일로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역사(驛舍)마저 수명을 다하면서 구도심 전체가 암울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같은 우려 속에 포항시는 지난해 4월 폐역한 옛 포항역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초 역사(驛舍)와 역부지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을 집창촌, 역전시장 등을 포함한 사유지로까지 확장하는 방안을 추진해 현재 성사단계에 이르고 있다. 본지는 창간 26주년을 맞아 해외특별기획시리즈를 통해 해외에서는 영국 맨체스터, 국내에서는 충남 보령의 사례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옛 포항역 개발을 통한 구도심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글 싣는 순서>
1. 영국 산업발전 견인차 `맨체스터 리버풀역`2. 영국 과학·산업 역사 한눈에 `맨체스터 MOSI`3. 시민의 발이 문화공간으로 `충남 보령문화의전당`
4. 포항역의 역사(歷史)와 KTX시대
5. 옛 포항역 부지가 지닌 가능성과 개발에 따른 기대효과
영국 산업혁명의 발원지 `맨체스터 리버풀 역`
철도개통 후 석탄·면직 등 화물운반으로 각광
♠ 산업혁명의 발원지에 철도개설 필요성 대두
영국의 북서부지방에 위치한 공업도시 맨체스터시는 18세기 산업혁명의 발원지이자 영국 면방직산업의 중심지였다.
내륙도시인 맨체스터가 당시 방직공장 가동에 필요한 원재료인 면화를 미국으로부터 들이기 위해서는 약 56㎞ 떨어진 인접 항구도시인 리버풀시를 통한 경로가 가장 빨랐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1773년 영국의 토목기사 제임스 브린들리의 주도 아래 리버풀 맨체스터 운하(Liverpool Manchester Canal)가 개통됐다.
브릿지워터 운하(Bridgewater Canal)로 불리기도 하는 이 운하의 개통은 영국 전체에 운하건설 붐을 촉발시켜 18세기 말 영국 전체에 건설된 운하의 총길이는 3천㎞에 달했다. 그러나 리버풀 맨체스터 운하는 평균 폭이 5m에 불과해 대형선박이 이동이 불가능한 구조라 불과 40여년 만에 화물 수요를 더이상 감당하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에 철도건설의 필요성을 인지한 맨체스터의 면방직업자와 리버풀의 상인들은 합심해 맨체스터~리버풀철도사업위원회를 창립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추진에 돌입했다.
위원회는 철도사업의 첫단계로 철도노선 측량을 시작했으나 자금과 인력 등의 부족으로 사업초기 진행이 더뎌지면서 사업담당자가 세차례에 걸쳐 교체되는 홍역을 치렀다. 위원회는 투자자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의 철도사업은 당시 주변 토지소유자, 농부, 운하사업자, 도로사업자 등으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샀다. 이러한 저항에도 위원회는 철도사업을 위한 개별법안을 위한 청원서를 수차례 제출했고 1826년 2월 우여곡절 끝에 영국의회와 국왕의 허가를 받았다. 이로써 맨체스터~리버풀 철도사업은 1826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철도공사는 14㎞의 제방과 21㎞의 토목공사, 63개의 교량공사를 포함하는 거대한 규모로 실행됐다.
현재 영국법 따라 철거없이 리모델링 재활용
♠ 우여곡절 많았던 철도개통 과정
맨체스터~리버풀 철도개통을 11개월 앞둔 1829년 10월 맨체스터에서는 특별한 대회가 열렸다.당시 열차운행을 맡은 L&MR(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Company는 증기기관의 성능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을 갖고, 증기기관 열차를 사용할 지 여부를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는데 이를 검증하기 위해 당시 금액으로는 적지 않은 500파운드의 상금을 건 기관차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대회에는 열차제작업체인 로켓(Rocket), 노벨티(Novelty), 산스 페레일(Sans Pareil), 퍼서브런스(Perseverance)에서 내놓은 증기기관차, 말 2마리에 의해 움직이는 Cycloped, 사람 2명에 의해 움직이는 매뉴모티브 캐리지(Manumotive Carriage) 등 6팀이 출전했다. 각 기관차는 기관차 무게의 3배에 해당하는 짐을 싣고 113㎞의 거리를 시속 16㎞ 이상의 속도로 달려야만 했다. 대회 결과, 증기기관 열차인 Novelty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 이벤트를 통해 L&MR Company는 증기기관의 장단점을 명확히 판단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열차개통 과정에서는 예기치 못한 참극도 잇따랐다.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Museum of Science & Industry, MOSI)의 모태이자 맨체스터~리버풀 노선의 종착역인 리버풀로드역(Liverpool Road Station)은 당초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던 역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종착역은 샐포드(Salford)에 위치한 햄슨가(Hampson Street)에 건립될 예정이었지만 1830년 4월, 공사현장에 투입된 12명의 노동자들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공사계획은 전면수정됐다.
1830년 9월 15일에 열린 철도개통식에서는 행사에 참석한 영국 국무총리 웰링턴 공작과 잠시 대화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던 리버풀의 의원 윌리엄 허스키슨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기관차를 발견하지 못해 왼쪽다리가 열차에 깔리고 말았다. 허스킨슨은 즉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몇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사고후 행사를 계속 진행해야 할 지 여부를 놓고 긴 토론이 이어졌고, 이 결과 행사를 계속 진행하되 허스킨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술을 더이상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
허스킨슨의 죽음으로 시민들이 맨체스터~리버풀 노선을 통해 열차여행을 하는데 공포를 느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는 개통직후 이어진 어마어마한 예약숫자에 의해 말끔히 씻겨졌다. 개통한지 한 달 만에 하루평균 1천200명의 승객이 이용하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
철도를 이용한 이동은 마차로 이동할 때와 비교해 두배 이상 빨랐으며 열차여행의 신기함은 승객들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화물운송은 개통 이듬해인 1831년부터 시작됐고 철도는 면직물, 석탄 등 다양한 물품을 운반하는 통로로 활용됐다. 이 노선은 가축의 운송수단으로도 이용되기도 했는데 1833년 당시 하루 평균 1천500마리의 돼지들이 맨체스터로 옮겨졌지만 당시 농장주인들은 정해진 규정없이 가축을 열차에 실으며 동물학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에도 불구, 철도를 활용한 화물운송사업은 각광을 받으며 개통한지 8년 만에 화물운송료로만 12만파운드를 벌어들였다. 맨체스터~리버풀 노선이 헌츠뱅크역(Hunts Bank Station)까지 연장된 1844년부터 리버풀로드역은 오직 화물운송을 위한 역할만 담당하게 됐다.
화물차들은 물품을 내리기 위해 창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2번 창고 앞 메인궤도에 위치한 `전차대(열차의 방향을 바꾸거는 장치)`로 인해 1, 3번 창고의 하차장으로 인도됐다.
승객들을 위해 사용됐던 대합실은 화물역을 운영하는 철도회사의 사무실로 1층 규모의 작은 임시창고는 열차에서 내린 화물을 마차 수레에 싣는 장소로 사용됐다. 이와 관련,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 홍보담당자 케이트 캠벨씨는 “리버풀로드역이 화물운송역으로 바뀐 1840년대 이후부터 약 30년간 역사 주변에 대한 대규모 개발사업이 진행됐는데 이 때 역주변에 대형창고가 여럿 갖춰지면서 더욱 많은 물동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며 “기존 건물을 함부로 철거할 수 없다는 영국법 따라 당시 역사(驛舍)와 주변창고들은 박물관과 영화관, 복합상가 등으로 리모델링 후 재탄생해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