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완화란 중앙은행이 윤전기를 돌려 화폐를 찍고 시중에 푸는 것이 본래의 의미다. 목적은 풀린 통화량이 자산을 따라 다니며 가격을 올리는 바, 우려하는 디플레를 방어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한국형`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로 부실기업 또는 부실은행을 직접 지원할 수 있다는 단서가 붙었기 때문이다.
본래 중앙은행은 통화량 조절의 기능만 있을 뿐 신용위험이 있는 자산에 투자할 수 없다. 그동안 경제에 부실이 생기면 공적자금을 조성해 민간부채를 정부가 흡수해 왔는데 이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한국은행이 직접 자금을 투입하자는 제안이다. 이렇게 원칙을 벗어난 정부의 제안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의 행동이 참고가 됐을 것이다. 은행 및 기업의 부실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ECB는 오는 6월부터 회사채를 매입하기 시작한다.
야당은 이러한 정부의 시도에 비겁하다고 비난한다. 경제정책에 실패했으면 먼저 용서를 구하고, 떳떳하게 공적자금을 조성해야 하는데 편법을 쓴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지금의 부실을 전적으로 현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경제의 노령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김대중 정부가 이를 감지하고 벤처기업을 장려했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을 육성하는데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가 한국의 민주를 한 단계 발전시켰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집권 5년이 한국경제에 있어 잃어버린 시간으로 생각된다. 경제성장 모델을 놓고 반성이 필요했는데 그러질 못했고, 그 후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내달려 왔다.
잘못을 누구에게 돌리기 이전에 야당에 묻고 싶다. “한국판 양적완화, 해서는 안 되는가?”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당장 고통을 현실화했다가는 그들을 지지하는 표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양적완화의 부작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양적완화는 미국, 유럽, 일본에서 있었다. 모두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시간만 버는데 그쳤다. 미국은 양적완화를 통해 시중금리를 낮췄다. 가계부채가 큰 미국인들은 낮은 이자부담 덕에 소비를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노후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이런 저금리가 만성적이라면 지금 저축을 더 해야 노후를 대비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 결과 소비가 실망스러워지고 있다.
일본의 양적완화는 엔화절하를 유도하여 아직 경쟁력을 잃지 않은 수출기업이 많은 돈을 벌고 종업원들의 임금을 늘려주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실패였다. 대표적인 예로 유니클로(Uniqlo)는 엔저로 인한 의복 수입 원가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일본 내 옷 값을 올려봤다. 임금소득이 증가했다면 옷 값 상승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결과는 판매 급감이었다. 유럽은 남유럽 사태 이후 부실과의 전쟁 중이다. 독일의 관용 속에 부실을 흡수하고 있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수준이다.
결론적으로 양적완화는 문제해결 능력이 없고, 단지 시간벌기이다. 특히 한국경제의 구조가 제조업 중심이므로 자칫 풀린 돈이 생산요소로 흘러들면 비용상승 인플레가 심각해질 수 있는 부작용도 있다. 수출기업 노후화와 함께 평가절하 압력을 받고 있는 원화의 가치도 양적완화로 인해 절하 속도가 가팔라질 수도 있다. 그러면 수입물가는 더욱 빠르게 상승한다. 이 경우 물가상승 부담은 자산을 갖지 못한 서민들에게 돌아온다. 지금은 석유 등 원자재 가격 하락 덕분에 물가 상승 부담이 숨겨져 있으나 양적완화로 인해 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악성 인플레가 나타날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양적완화를 해서 시간을 벌었을 때 할 일(action plan)은 갖고 있는가? 기능을 회복할 수 없는 부분을 발견해서 과감히 잘라 내고, 신성장동력 관련 규제를 빠르게 풀어 한국 경제에 새 살을 돋게 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고통스럽지만 지금 고름을 짜는 편이 낫다. 단순히 시간만 번다면 그 만큼 부실이 커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