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영화로 나왔지만 아직 관람하지 못했다. 언젠가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그때가 되지 못한 것 같다. 심리적인 문제다. 영화로 윤동주를 볼 때 내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뜨겁고도 순결한 젊은이의 모습과 어긋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다.
대신에, 며칠 전에는 윤동주의 누상동 하숙집을 찾아갔다. 누상동이라면 서울의 종로구에 있는 동 이름의 하나, 그 밑에는 누하동이 있다. 종로구는 아마 동 수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구일지도 모르겠다. 웬 작디 작은 동네가 그렇게 많은지, 체부동, 통인동, 옥인동, 당주동, 묘동, 부암동, 필운동…. 처음 들어보면 낯설지만 유서 깊은 종로답게 다 유래가 있고 내력이 있는 동들이다.
그 가운데 윤동주가 서울에서 연희전문 4학년 여름 한 철에 잠시 하숙했던 집이 누상동 9번지에 남아 있다. 터라도 남아 있는 게 어딘가? 모든 것이 세월에 쓸려가기 쉬운 이 나라 현대에 말이다.
맘 먹고 윤동주의 흔적을 찾아가는 날, 실마리는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1번 출구다. 여기서 지상으로 나와 나오는 방향으로 배화여대 가는 길로 가다 필운대로 쪽으로,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꺽어든다.
거기서부터 한동안 한길을 따라 곧장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중간에 시인 박미산씨가 운영하는 카페가 나온다. 길가 2층의 `백석, 흰 당나귀`라는 간판을 보고서야 내가 한 2, 3주전에 여기 왔던 길임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때는 카카오 택시를 타고 곧장 찾아가 몰랐는데 바로 이곳이었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마다 백석의 시로 낭송회를 연다는 곳이다. 들어가 보면 반가운 얼굴들이 있을 것 같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조금 가다 보니 청전 이상범 가옥이 보인다. 충청도 공주 태생인 그는 변관식과 함께 우리 근대 초기 한국화의 대가로서`동아일보`일장기 말소 사건에도 연루된 바 있고 신문 연재소설에 삽화도 많이 그려 문학과도 인연이 깊다.
한길에서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있는데 마음 바쁠 것 없으니 그냥 들어가 본다. 대문 열고 들어가니 한옥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온다. 한국화가가 살던 곳은 역시 한옥이어야 할 것 같은 아름답고 고즈넉한 집안에 잠시 섰다 나온다. 마음이 한결 단정해진 것 같다.
또 한길을 따라 가다 정자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꺽어 올라간다. 누하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보였는데 이제부터는 누상동인가 보다. 그런데 눈이 휘둥그레진다. 서촌이 뜨고 있다기에 그 서촌이라면 저 밑에 체부동, 통인동 쪽 금촌시장이나 통인시장 있는 쪽인가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다.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 쪽. 이 방향이 진짜 뜨고 있다는 서촌의 온상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기자기 어여쁘고 귀엽고 깨끗하고 정이 가는 건물들, 가게들이 많다. 이 동네가 뜨면 저 동네가 가라앉고 또 뜨는 동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시키는 짓이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유서 깊은 동네가 다시 한 번 각광을 받고 사람들의 전통 의식을 자극받을 수 있게 함은 나쁘지만은 않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의 좋은 부산물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가까이 온 것 같다. 한옥들이 어느새 원룸 신축 가옥들로 바뀌고, 물론 그것도 지금은 꽤 오래된 건물이 된 것 같지만, 잠시 후에 왼쪽 편에 태극기 마크도 단 윤동주 하숙집 터가 나타난다. 윤동주는 그때 후배 정병욱과 함께 소설가 김송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로서는 가장 좋았던 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아침에는 인왕산 바로 아래 수성동 계곡에서 세수를 하고 산책을 하고 밤에는 전차를 타고 시내로 나와 적선동 거쳐 누상동 하숙집에 돌아와 책을 읽었다고 했다.
그 동주의 집이다. 스물아홉 살 젊은 나이에 사라져 간 순결한 젊은이의 집 앞에서 나는 그가 남긴 문학의 순수함은 나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순결성 때문이었음을 다시 한 번 힘주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