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사람이 하는 활동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노동, 또 하나는 작업, 마지막 하나는 일종의 정치다. 사람들은 먹고 살아가기 위해 노동하고, 남기고 기억하기 위해 학문과 예술활동 같은 작업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모여 토론하고 투표를 하고 결정을 짓는다.
이 마지막 정치는 어떻게 하느냐? 바로 말로 한다. 서로 나와서 연설하고 동의하고 반박하고 투표를 한다.
이 말이 더 이상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몸으로 벌이는 싸움이며, 살상무기를 서로에게 들이대는 전쟁이다. 그러니 말이 제 몫을 해내는 곳에 싸움과 전쟁이 있을 수 없을 테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 깊고도 큰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역시 언어적 동물이다. 모든 것을 말로 처리한다. 이번 4·13 선거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입증된 진리다.
인상적인 세 가지 장면이 있었다. 첫째, 어떤 의원 분은 선거에 나갈 수 있는 시한이 겨우 한 시간이 남을 때까지 스스로 당을 나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먼저 말하지 않고 때가 와서 민심이 움직일 때까지 침묵할 줄 아는 것. 참을 때까지 참는 인내력을 가진다는 것. 간단치 않다.
둘째, 또 다른 의원 분은 야권 연대가 무산되자 책임을 지고 이번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야권연대가 안 되면 야당이 패배할 것이라는 판단은 속단이었다. 속단에 근거한 말은 세상을 움직이지 못했다.
셋째, 한 유력한 대통령 후보는 호남에 가서 호남이 지지를 거둔다면 대권을 향한 도전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매우 결정적인 선언이었고 그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때는 선거를 며칠 앞둔 때였고, 야당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 선언은 자승자박이 되었다. 이 줄을 풀어내기가 쉽지만은 않게 됐다.
말은 무섭다. 말은 주먹도 아니고 발길질도 아니지만 상대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스스로를 넘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막말을 둘러싼 논란이 거듭되었다. 전화로 막말을 한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상대를 향해 비난의 말을 던진 것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기도 했다. 국회에서 정당 공천을 받고 못 받고는 아주 중요한 문제 같은데, 바로 말이 그것을 좌우하게 되는 경우가 아주 여럿이었다.
말은 단지 국회의원들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 댓글에서도, 트위터에서도, 팟캐스트에서도 말은 그 위험성을 드러냈다. 거친 말, 비아냥의 말, 조롱, 야유, 냉소에 찬 말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낸다. 그러나 그런 말은 그런 말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무서운 독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판단력이 흐리지만은 않다. 투명하지 못한 야유, 석연찮은 비난을 일삼다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그의 인격을 얕게 보게 되고 심지어는 그를 향해 역비판을 가하는 일이 생겨난다.
우리 한국인의 정치에서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이 아마도 말의 기술이 아닐까 한다.
기술이라고 했지만 같은 뜻을 가진 말도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효과와 기능이 달라진다. 부드러운 유머, 정곡을 찌르는 위트, 에둘러 상황을 표현하는 여유 같은 것이 없이, 생각과 감정을 메마른 직설적 언어로만 전달하려 할 때 정치는 험해지고 타협과 양보의 여지는 사라진다.
정치를 하는 분들이 스타일이 모두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분은 직설적인 어법을 중시하고 어떤 분은 부드러운 표현을 중시할 수 있다. 둘 다 장단이 있다. 그러나 극단은 금물이다. 직설이 극에 흐르면 대립과 반목의 주인이 되고, 유머가 지나치면 허언으로 빠진다.
그러나 두 방향의 장단의 비중은 같지 않다. 허언은 그 자신만을 실없이 만들지만 직설적 극언은 남을 해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