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술을 먹다 술이 사람을 먹는 단계에 이르면 조심해야 한다. 헛소리가 들리고 헛것이 보이기도 하니, 정신을 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소주 같은 독주는 가급적 삼가고 먹어도 막걸리나 맥주 같은 저알코올을 찾을 것이며, 음주운전 따위는 아예 멀리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둘로, 셋으로 보이지 않도록, 여기도 들리고 저기도 들리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 한다.
옛날에 내 먼 친척 한 분은 겨울날 집앞에까지 다 오셔서 초인종을 못 누르고 그냥 눈을 맞아 돌아가셨다고 하며, 나만 해도 15년 전쯤 집 앞 골목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맥주 캔을 집어 던지는 조폭 선생을 만난 적도 있다. 대리운전으로, 콜을 해서, 돌아올 때도 행여 운전하시는 분 비위를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밤에 집에 들어와 씻고 앉으니 하루의 피로가 고스란히 밀려온다. 오늘도 고단했다는 사실은 또렷한데, 무엇을 위해서 왜 그런 하루를 보냈는지 명확치 않다. 시류 따라 풍랑에 흔들리는 나룻배 같은 신세 면치 못한 하루였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옳은 것, 아름다운 것은 멀리 있다. 나 또한 이 속의 타락한 일부다.
습관이 되어버린 팟 캐스트를 들으려고 휴대폰으로 팟빵을 클릭해서 검색을 하다말고 덮어버린다. 요즘 팟캐스트, 나는 진보요, 좌파요, 하고 이름 붙이면 바로 그것이 되는 줄 아는 듯한 목소리들이 너무 많다. 그 목소리들마다 논리가 있고 그들 자신이 믿는 양식이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겨울 이후 그 목소리들은 어쩐지 정치적 파당 논리에 함몰되어 버렸다. 진짜 정신을 잃고 무엇인가 곧 달성해야 할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듯한 그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을 찾고 그 목소리 속에서 위안을 얻던 시절은 갔다. 쓰디쓴 환멸과 기댈 곳 없는 공허가 이 밤의 심사를 더 외롭게 만든다.
앞으로 이십여 일 남짓, 어떤 사람들은 저마다 다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 손을 내밀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공동체적 구성원을 위해서 그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소리를 높일 것이다. 나 또한 그중의 한 그룹에 소속되려는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 책이 한 무더기 쌓아 올려져 있다.`숙향전, 숙영낭자전`합본이 있다. 오늘 밤같이 절박한 현실의식의 시간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다중`이라는 책도 있다. 다중은 민중과 같은 동일자가 아니며, 대중과 같은 획일자도 아니며, 노동계급과 같은 공장제 산업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서로 다른 곳에 처하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저마다 서로 다른 특이성을 지니되 공통성을 갖춘, 인류 사회의 새로운 미래 주체다. 오늘밤 이`다중`은 왜 그렇게 공허한 추상으로 보일까.
아무래도 오늘밤은 책도 아닌 것 같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의 말씀 앞에 엎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씀도 오늘밤은 내 앞에서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내가 누구며 무엇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며 어떤 세상에 살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이광수의 장편소설`흙`은 중학교 때부터 읽으며 좋아했던 소설이다. 또한, 내가 아직까지 충분히 조명하지 못한 그의 소설이기도 하다. 허숭은 서울에서 성공할 수도 있는 변호사인데, 자기 고향인 살여울로 가서 농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가리켜 계몽 소설이라고들 논의하곤 한다.
최근에 내가 얻은 이 작품에 관한 한 생각은, 소설 속 허숭은 자기 고향을 일깨우러 간 것이 아니요, 그 흙의 땅에 귀의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는 고향에서야 안식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오늘 같은 밤에 나는 귀의할 곳, 돌아가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한다. 내가 기댈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을 힘이라는 말로 불러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