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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운 어른이 될 줄 모르고

등록일 2016-02-25 02:01 게재일 2016-02-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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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바라던 대로 서울 날씨가 며칠 사이에 다시 추워졌다. 외갓집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으니 날은 날대로 춥더라도 다행이다.

겨울이 오면 덕산 북문리 외갓집 동네에는 눈이 쌓인다. 어린 소년의 무릎까지 차도록 눈이 쌓이면 마당에도 눈, 대문 바깥에도 눈, 동구밖에서 저 너머 `읍내`로 통하는 고갯마루까지도 눈, 경운기나, 차나 한 대 겨우 다닐 만한 길 양쪽 옆 논두렁 밭두렁에도 눈. 눈천지 세상이 되면 아침부터 가래로 눈 치우는 소리가 난다. 외할아버지도, 외삼촌도, 외사촌형도 눈을 밀고 쓴다.

매일같이 눈만 내리지는 않으니까 아이들은 다행이다. 겨울에 제일 신나는 건 썰매를 타는 일. 외갓집 동네에는 여름에 연꽃이 열리는 방죽도 있고 동네 바깥으로 물을 가둬 얼려둔 얼음판도 있다. 집집마다 나무판 밑에 철사를 댄 썰매를 만들어 나오게 마련인데, 보통은 양날 썰매지만 가끔 스키 타듯 중심을 잡고 타야 하는 외날도 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달리는 맛도 좋지만 날이 풀리기 시작해서 언제 꺼질지 모르게 물이 밴 얼음판 위를 아슬아슬 달리는 재미도 좋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갓집에 모인 외손자, 외손녀들이 덕산온천으로 목욕을 하러 가기로 한다. 외갓집 외손들은 다 합치면 열아홉명, 그 중에 외갓집 양식 축내러 그때 모인 여서일곱 외손자, 손녀를 싣고 외사촌형이 경운기를 몬다. 동구밖을 지나 고개를 넘어 면사무소, 양조장 앞을 지나쳐 수덕사 쪽으로 경운기가 달린다. 춥다. 하지만 몸이 뜨거운 아이들은 추운 줄을 모른다. 덕산온천까지 경운기로 얼마나 걸렸을까? 아마 삼사십 분은 족히 갔을 것이다.

지금은 무슨 온천장, 호텔, 모텔이 그렇게 많이 생겼는지, 그때는 온천장이라고는 오로지 하나였다. 남탕도 있고, 여탕도 있고, 가족탕도 있었다. 언젠가 엄마, 아버지, 동생들하고 가족탕에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 외갓집 아이들끼리는 남녀가 유별하다. 사내아이들은 남탕으로, 계집애들은 여탕으로 들어가 한 시간 남짓 들어갔다 나오면 볼은 빨갛게 피어오르고 피로를 모르는 유쾌한 아이들은 장난들을 쳐댄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야 한다. 모두들 경운기 짐칸에 다시 올라탄다. 헌데, 아뿔싸!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재미나고 신났지만 나중에는 머리가 시리고 귀가 시려온다. 춥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 마침내 고갯길로 접어든다. 동구 앞 첫째집이 외갓집이다. 무섭게 몸이 추워져 경운기가 서자마자 대문간, 마당, 툇마루, 안방으로 달려든다. 외할머니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니 얇은 얼음박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아랫목 이불 속으로 기어들면 그제야 살 것 같다. 외할머니가 늘 버티고 계신 안방은 언제나 따뜻하다.

저녁을 먹고 어느덧 밤이 오면 외숙모는 부엌에 나가 식혜를 떠오기도 하고, 찐고구마에 동치미를 내오기도 하고, 예산에서 나는 국광 사과 못 생긴 것들을 내와 깍아주기도 한다. 이모부들, 이모들은 제각기 패를 짓는다. 여자들은 외할머니와 같이 안방에서, 남자들은 외삼촌방에서, 아이들은 건넌방에서 제각기 논다. 여자들은 무슨 얘기들이 그리도 많은지, 남자들은 바둑 아니면 내기 화투놀이, 아이들은 만화책, 동화책도 보고 무서운 얘기도 하고 이불 밑에 들어가 서로 얽혀 시시덕거리기도 한다. 외할아버지만은 늘 혼자 어둡고 좁은 당신 방에 들어앉아 라디오를 들으신다.

그방에는 늘 외할아버지가 피우시는 담배냄새가 나고 곰방대가 있고 질화로가 있고 시조 악보가 있고 오래된 책들이 있다.

밤이 깊으면 이제 자야 한다. 안방쪽에서는 외할머니와 큰이모와 엄마와 막내이모가 서로 큰 소리를 내며 옛날 얘기들을 한다. 외할머니가, 당신이 다 잘못했다고 말하는 소리도 들린다.

어른들은 사연이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것도 없다. 나중에 자기들도 다 커서 서러운 사람들이 될 줄 모르고 키득키득거리다 잠에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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