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서울은 몹시 춥다. 며칠 포근하고 따뜻해서 이대로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나 했는데. 역시 착각이다. 그렇게 쉽게 오는 봄이 아니다. 개구리가 튀어나왔다가 맹렬한 추위에 얼어죽을 지경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오슬오슬 떨면서 왔다갔다 하다 보니 마음이 몹시 시달린다. 뭔가 따뜻했던 일을 떠올리려 해 보니, 갑자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무슨 일일까. 오래 잊고 지낸 분들인 것을.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나 무척 부지런한 분들이셨다. 덕산 하고도 북문리, 면사무소, 덕산 국민학교 옆으로 난 샛길로 접어들어 야트막한 고갯길을 넘어들면 아늑한 북문리 동네가 눈에 든다. 얕기는 얕아도 여우가 나온다는 고개, 밤 늦어 뭐라도 사러 `읍내`로 들어갈 때면 귀밑이 쭈뼛해지는 고개. 그걸 넘어 내려가면 외갓집 세상이다. 외할아버지는 가운데 할아버지, 외조부 삼형제가 한 동네에 옆에, 뒤에 함께 사는 동네에 내가 들어서면 아버지 고향보다 더 내 고향 같은 곳이 바로 그 북문리다.
외갓집에서 자면 새벽 댓바람부터 외할아버지께서 대빗자루로 토방을 싹싹 쓰시는 소리가 들린다. 중천에 해 떴는데 왜들 안 일어나고 방안에 뒹구느냐고, 우리들한테 직접 호통을 치지는 않으시고 마당에서 중얼중얼 하시는 말씀이 들린다. 그러면 열아홉이나 되는 외손자, 외손녀들 가운데 셋씩, 넷씩은 늘 와서 묵게 되어 있는 우리들은, 할아버지니까 무서워서, 고개가 움츠러들면서도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마당 우물로 세수를 하러 나가야 하는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힘에 밀리신 것인지, 늘 안방 아니라 건넌방 작은 골방 같은 곳, 그렇게 좁을 수가 없고, 그렇게 컴컴할 수가 없고, 할아버지 냄새 첩첩 쌓여 묘할 수가 없는 냄새가, 그것이 외할아버지의 영지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라디오가 한 대 있다. 모양은 지금 가물가물, 다만 내가 공주에서 들었는지, 북문리에서 들었는지 모르는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이나 민요 같은 것이 흘러 나오는 라디오. 그 옆에는 외할아버지 베개가 하나 있고 벽장이 있는 새까만 골방을 외할아버지는 마치 당신의 영토처럼 지키고 계셨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외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괴팍하고 깐깐하고 무섭다. 왜 볏짚가리 싸놓은 걸 위에 올라가고 구멍을 파고 들어앉고 해서 헤쳐놓느냐고 자디잔 외손들 행패를 어지간히 성가셔 하시고, 감나무 올라가지 마라, 소나무 올라가지 마라, 아침에 단 한 번 외할머니 계신 안방에 들어오셔서 딴상으로 아침밥을 드시면서, 반주 한 잔을 입 밑에 수염에 술방울이 맺히도록 드시면서, 마주 앉은 나는 무슨 소린지 들어먹을 수도 없는 말씀을 이 말씀, 저 말씀 하시면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식사가 끝나실 때까지 끝날 줄을 모르시던 그분.
그런데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제주 고씨 탐라 왕조 몇십 몇대 손이라시던가. 한번 역사 얘기가 나오면 폐비 윤씨 얘기에 묘청이 난을 일으키던 얘기에 우암 송시열이 사약 받던 얘기에, 무슨 무슨 얘기들이 혹부리 할아버지가 혹에 이야기 보따리를 감추신 것처럼 밤 깊어 내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지도록 하품을 할 때까지 그침이 없으셨다.
어린애가 역사를 안다고, 똑똑하다고, 계몽사판 한국사이야기에 나오는 지식으로 어린 연산군이 어머니의 피묻은 한삼자락을 보고 한을 못 이겨 부왕의 귀인들을 때려 죽이는 대목까지 죽을 맞추면, 친손 아니라 외손인지라 그리 반가울 것도 없지만, 또 그리 싫을 것은 없으셔서 한 말씀 겨우 칭찬을 해주셨다.
늘 표정이 굳고 불만이 있으신 것 같은데도 돌이켜 보면 어느 놈 붙잡고 호되게 혼내신 적은 한번도 없고, 하루는 내게 수수깡을 다듬어 아이들 노는 놀잇감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달밤에 대청마루에 나를 데리고 앉아 옛날 제주도 삼성혈 얘기까지 느릿느릿 회상조로 풀어주시기도 했다.
하,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 따사롭고 따사로웠던 요람 같던 시절. 다음 주에도 몹시 춥기 바란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얘기가 무진무궁 끝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