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새해 하면 뭐니뭐니 해도 설이다. 한때 신정이라 해서 양력설을 지냈지만 일제시대 유습일 뿐이요, 음력 설날을 대신할 순 없다. 양력이니 음력이니 하는 것은 단순한 과학의 문제가 아니요 농본주의 민족인 한국인들의 전통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 이상이 도쿄에서 1937년 초에 보낸 편지를 보면 `오늘은 음력으로 제야입니다. 떡이며 너비아니며 수정과며 그 모든 기갈의 향수가 못살게 굽니다` 하고 도쿄 이민족들 속에서 홀로 설을 맞이하는 외로움을 절절하게 피력했던 것이다.
설 하면 뭐가 생각날까? 우선 떡국이요, 차례상이요, 식혜요, 쇠고기 산적 같은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술, 이 술 저 술 다 합쳐서 술일 것이다. 왜냐? 정든 식구들, 고향 친구들 만나면 술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는 우리들 스스로 다 알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아랍의 알 자지라 방송이 악명 높은 한국의 술 문화를 장장 25분이나 방영을 했다던가? 또 아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술에 관해 최근에 얻어들은 유머 하나를 소개하면 실상이 이렇다. 이 유머에 이렇게 쓰여 있다.
동문회란? 같은 학교 졸업자들이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다. 산악회란? 산에 가서 술 먹거나 하산 후 술 먹는 모임이다. 조기축구회란? 아침에 공차고 저녁에 술 먹는 모임이다. 향우회란? 같은 고향 출신들이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다. 수련회란? 무슨 훈련한다고 밤 새워 술 먹는 모임이다. 문상이란? 초상집에 가서 술 먹는 모임이다. 연수회란? 회사에서 몇 날을 괴롭히면서 술 먹여 주는 모임이다. 망년회란?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술 먹는 모임이고, 신년회란? 새해를 맞아 술 먹는 모임이다.
그럼, 번개란? 갑자기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하나도 틀린 게 없다. 한국인들이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유머 하나만으로 가히 짐작하고 남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술을 잘 마시는 것일까? 필자가 15년 전쯤에 겪은 일 하나를 소개한다. 그 무렵 필자는 인생을 비관하지는 않았어도 세상 일에 못마땅한 것도 많고 필자 자신에 대해서도 괴로운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비평하는 사람 `답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다 보니 선배들과도, 다른 문학인들과도 편치 않은 관계 투성이였다. 참을 인 자 세 번을 쓰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어디서든 욱 하는 마음이 도지면 다툼을 무릅쓰지 않곤 했고, 술을 마시면 이 좋지 않은 성정이 더 드러나곤 했다. 현실 속에서 괴로운 일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필자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무렵에 서울 인사동에 `평화 만들기`라는 술집이 있었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행사 끝나면 단골로 가는 곳인데, 지금 생각하니 무료로 내주는 백김치 안주가 맛이 일품이었다. 거기서 보통 때나 다름 없이 나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술을 마시는데, 어른들 앉아 있는 자리에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보니, 평론가 구중서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분이 앉아 계시는데 그렇게 화기애애할 수 없다. 그날 따라 마음이 변할 때가 돼서 그랬는지 필자가 선생들 계신 곳으로 갔다. 그리고 여쭈었다. 여러번 보기를 술을 드시면서도 한 번도 다투는 모습을 보이신 적 없으니 어떻게 해서 그러실 수 있는지요? 그러자 그중에 한 분인지 구중서 선생인지 말씀하셨다. 술을 마실수록 유쾌해지고 화창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거라면 술 마실 필요가 없다.
듣는 순간, 크게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며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리라. 정신 놓도록 마시고 싸우는 일 없도록 해야겠다.
정말 그렇게 되었던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로 술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 술은 갈등을 녹여 사람들을 잇고 화해하게 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신이 우리 사람에게 준 것 중에 그중 신묘한 것이 술이다. 그 술로 독을 만들지 않고 꿀을 삼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특히 우리 한국인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