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무디스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했다. 유동성의 신흥국 이탈에 우려의 시선이 쏠린 지금 한국은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경상수지도 불황형이지만 아직 큰 흑자를 기록 중이다. 그런데 신용평가 기관은 현재의 재무상태 위주로 평가하므로 뒷북치는 경향이 강하다. 무디스도 한국의 주력 제조업이 안고 있는 고민을 돌아 볼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다.
제조업의 비극은 2000년대 들어서며 시작됐다. 우리가 IMF사태로 알고 있는 98년 외환위기의 표면적 원인은 달러부족이지만 근본적 원인은 제조업이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을 버는 설비가 있는데 왜 달러를 빌려주지 않겠는가.
90년대말, 그리고 2000년대초 미국과 유럽에 큰 변화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은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투자에 실패하거나 어떤 사태가 닥쳤을 때 회복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구 노령화가 진행될수록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고,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다.
2000년 이전 고성장기에는 만드는 만큼 팔렸다. 누가 대형설비를 갖고 싸게 만드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했다.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 등 한국의 거인들의 투자 결단이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후 인구 노령화가 진행될수록 수요는 점점 실종됐다. 사람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줘야 수요가 생겼다. 더 이상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고, 수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창조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변화보다 안주를 선호했다. 극치를 보여준 것이 2012년경 중국이 만든 슈퍼사이클이다. 중국 소비로 인한 제조업 부흥이 또 한번 시작된다는 기대였다. 사실 그 때가 제조업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한국의 조선, 철강산업은 시설을 확장했다. 경영진의 능력이 아쉬운 대목이다. 자원 외교까지 등장했으니 두 말할 필요도 없겠다.
한국이 자랑하는 IT, 자동차도 기술의 패러다임이 바뀌며 위협에 직면했다. 반도체는 미세화 기술 발전이 한계에 도달해 지난 몇 년간 경쟁 없이 평온했다. 그러나 D-ram에서 R-ram 또는 M-ram 등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가 등장할 예정이다. 경쟁은 재개될 것이다. 더욱이 이 때를 기회 삼아 중국업체들이 진입할 기세이다. 그들도 수 많은 가전제품을 만드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수입에 의존하기 싫을 것이다. 과거 엘피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본 정부가 은행들을 불러 기간산업인 반도체가 힘들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아무 말없이 순응했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분명히 엘피다를 파괴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죽지 않았다. 이제 중국정부와 싸워야 하나?
세계 자동차 산업은 수요 위축에 직면할 것이다. 인류가 저성장으로 인해 가난해짐에 따라 자동차 운영비를 절감해야 한다. 자동차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무인자동차의 개발은 이를 수월하게 한다. 즉 차 안의 소프트웨어에 서비스할 대상과 행선지를 입력하면 스스로 돌아 다니며 여러 이용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자동차 업체들이 수요 위축을 우려하며 자동차 공유를 반대하고 로비해 왔지만 이제는 하나 둘씩 대세에 투항하는 국면이다.
2000년대초 김대중 대통령이 벤처투자 붐을 조성했다. 사실 그 때가 산업의 구조를 바꾸기 시작해야 하는 적기였다. 당시 바이오, 게임 등 소프트 산업 쪽 병역특례도 많았는데 그 곳에 몸 담았던 명문대생들이 IMF사태 이후 취업이 되지 않아 눌러 앉게 된 것이 오늘날 한국의 바이오, 게임산업의 부흥을 일으켰다는 재미있는 후일담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대다수의 벤처들은 사라졌다.
정부는 창조경제를 위해 벤처를 다시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규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기득권의 로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그러나 쓰러져 가는 기득권을 지켜볼 것인가? 그들을 대체할 신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