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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의 기초는 산업생산량이었다

등록일 2015-12-08 02:01 게재일 2015-12-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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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개화<br /><br />단국대·하버드대 방문 교수
▲ 배개화 단국대·하버드대 방문 교수

이번 가을 학기에 필자는 하버드에서 `Forced to be Free` 제목의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은 1898년 이후 `제국, 그리고 점령자이자 국가 건설자로서의 미국`에 대해서 강의하였다. 그런데 정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 수업 시간에 들은 청나라 고종 황제와 영국의 조지 3세와의 서신 내용이었고, 청나라가 한 때 세계 1위의 산업생산국이었던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동시에 필자는 청 제국의 몰락에서 배울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보았다.

1793년 조지 3세가 교역을 할 것을 요청하자 고종 황제는 “우리 제국은 모든 것을 충분할 정도로 갖고 있으며 국경 안에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니 외부의 야만인으로부터 물건을 수입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산업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33%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영국은 2%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100년도 지나지 않은 1860년이 되자 청나라와 영국의 산업생산량은 교차점을 지나 역전되기 시작했으며, 1900년에는 중국은 6% 영국은 18%가 되었다.

1860년은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 Taiping Rebellion)이 한참 일어나던 시기였다. 태평천국은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다. 교전 상대는 청나라 조정과 기독교 구세주 사상을 기반으로 한 종교국가 태평천국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은 명청 전쟁 이래로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 전쟁이었으며, 인류 전체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유혈낭자한 내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난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2천만에서 7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난민 신세가 된 사람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또한 1856년에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는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유럽의 중국 침략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구성한 연합군으로 광저우를 침략하여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톈진을 점령하여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었다. 연합군은 톈진 조약 이후에도 진격을 계속해 1860년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세계 최고의 국가가 2류 국가로 몰락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배울 점은 없는지 생각해보자. 일단 태평천국의 난은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는 태평천국과 유교 국가 청나라의 전쟁이다. 즉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집단들이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대규모 전쟁을 치렀으며, 그 결과 최대 7천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민이 생명을 잃었다. 당시 중국은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국민의 상실은 곧 노동력의 상실을 의미하고 이는 곧 산업생산량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 정치, 특히 보수 정당이 끊임없이 이념 갈등을 조장하고 모든 문제, 특히 경제적인 문제를 이념적인 문제로 몰아서 상대방과 대화나 타협을 하기보다는 진압을 하려고 하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국가 경제나 국민 생활의 향상보다는 `권력 유지`에 골몰하다 보면, 국력은 점점 쇠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정치 집단들이 권력 투쟁에만 골몰하는 모습은 국가의 행정력으로는 현재 우리 경제를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비관적인 의심조차 들게 만든다.

세계 제2위 산업생산국으로 올라선 중국, 그리고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군사적 자율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움직임 등은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 점점 비관론을 갖게 한다. 어차피 나는 연구실에 혼자 앉아 키보드나 두들기는 수준이므로 이런 문제는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잊어버리자 하면서도, 자꾸 걱정이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좀 더 국민 생각, 국가 걱정을 하는 정치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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