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김재욱 왕의서재 펴냄, 240쪽
마음을 베이는 많은 경험 중에서 언어는 놀라운 마법사다. 비단 상투적 표현을 뛰어넘는 시인의 언어만을 일컫는 건 아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구나 하는 공감의 언어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진다.
보통은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들이 튀어나오거나 깨달음이 왔을 때 그런다. 그 토대는 공감이다. 한시가 마음을 벤다면? 그건 옛사람이 지은 시에서 예나 지금이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김재욱의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왕의서재)에 나오는 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벤 한시가 있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삶에서 기쁨, 슬픔, 분노들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정화 작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옛사람의 시구엔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사유와 역사인식도 녹아 있다. 오늘을 사는 지혜임이 틀림없다.
“평생의 이별의 한, 병이 되어서 / 술로 고칠 수 없고 약으로도 다스릴 수 없네. / 이불 속 눈물은 마치 얼음 밑의 물과 같아서 / 밤낮으로 길게 흘러도 사람들은 모를 거야.”
허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류 시인이 지은`규방의 한(閨恨)`이라는 시다. 첩의 신분으로 평생 남편인 조원을 그리워하다 사그라진 여성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첩이 됐고,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그 재주를 맘껏 펼치지 못하고 억눌려 살았던 이옥봉의 처지, 나아가 동시대에 있을지도 모를 수많은 `이옥봉`들의 삶이 떠오른다.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에 소개된 한시 50수는 사랑, 사회, 역사, 영물, 자연, 죽음, 친구라는 7가지 주제로 나뉜다. 일곱 개 주제마다 여섯 수에서 여덟 수를 할애했다.
문 앞의 흙 다하도록 기와를 구워도 / 그 집 지붕 위엔 기와 조각 없는데 / 열 손가락에 진흙도 묻혀보지 않은 사람이 / 비늘 같은 기와 얹은 큰 저택에 사는구나.(`기와 굽는 사람`)
이 시를 지은 이는 매요신이다. 천 년도 더 된 옛날 일인데 마치 지금의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시인은 노동하는 사람들은 죽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데 왜 너희만 부유하게 사느냐고 질책하고 있다.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을 말하고자 했다.
이책에는 모두 마흔일곱 명의 작가가 등장한다. 이백, 두목, 김창협의 작품이 두 수씩 실려 있다.
중국 작가로는 당나라의 이백, 왕유, 두목, 송나라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 후대의 매화시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임포, 강서시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진사도 등이 있다.
우리나라 작가로는 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대문호인 이규보, 이색을 비롯해 조선 후기 문장의 쌍벽을 이루는 박지원, 김창협, 사실적인 사회 시로 주목받은 권필, 경술국치 때 목숨을 끊은 황현 등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기본적으로 당대 또는 후대 작가들에게 널리 읽혔다. 나아가 작품 창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으로 유명한 동방규의`소군원(昭君怨)`, `권토중래(捲土重來)`가 나오는 두목의 `제오강정(題烏江亭)`, 작품의 내용 모두가 후대 작가들의 인용 대상이 됐던 임포의 `산원소매(山園小梅)`, 성리학자의 실생활에까지 영향을 준 주희의`관서유감(觀書有感)`, `춘향전`에 `행인임발우개봉(行人臨發又開封)` 한 구절이 소개된 장적의 `추사(秋思)`, 폭포의 장관을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이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고관대작들의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질책한 권필의 `충주석(忠州石)`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의 작품 역시 이들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작품성이 있고 지명도가 높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