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에는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용기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성리학의 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인 사단칠정론에 의하면 이성에 바탕을 둔 인의예지가 사단이며, 감성에 관한 희노애구애오욕이 칠정으로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이라 했다.
그 중에서 겉으로 드러내기가 매우 불편한 감정이 `구(懼)`이다. 구는 두려움을 말하는데,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든 두려워한다는 것이 사나이답지 못해 보이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만 같은 생각에 가급적이면 그것을 꿀꺽 삼켜 속으로 감추곤 한다.
내 기억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무서운 것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무서움은 대게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십리길을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그 무렵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내게 깜깜한 밤길은 두려움의 종합선물세트였다. 어쩌다 하교가 늦어 밤길 귀가를 할 때면 가로등도 없는 십릿길을 온갖 공포스런 상상들과 함께 내달렸는데, 그 중에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대표적인 대상은 문둥이와 간첩이었다.
들판 길을 달릴 때면 보리밭에 숨어 있다 어린아이의 간을 빼먹는다는 문둥이 생각으로 등줄기에 땀이 흘렀고, 무장공비 소동이 종종 있었으며 반공교육이 워낙 강조되던 때라 눈이 빨간색일 것 같은 간첩이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숨이 턱에 차서 도착한 동구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님을 만나면 어찌 그리 든든하고 안심이 되던지, 지금 생각하니 그도 여인이라 어둠속에서 두려움을 간신히 참고 계셨을 터인데….
세월따라 두려움의 대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나이 들고 세태도 달라진 요즘 가장 무서운 것은 말이다. 말은 사용하기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데,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약이 된 경우이며 `칼에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혀에 베인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는 말이 지독한 독이 된 경우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혀 밑에 도끼가 있다`는 말도 있다. 세치 혀로 하는 말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말들이다. 나쁜 말은 나와 남을 모두 해치지만, 고운 말은 나와 남을 모두 살린다는 삶의 진리(眞理)를 선조들도 후세에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실체도 없고 향기도 없고 흔적도 없는 것 같지만 마음에는 오랫동안 머무르는 힘을 가진 것이 말이다. 고운 말, 격려의 말 한마디에 기운을 내기도 하고 독한 말 한마디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독이나 화, 칼이나 총처럼 위험한 것들은 외자로 된 경우가 많다. 말도 외자로 되어있다. 말이 외자인 이유는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되니 짧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만큼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기업인의 메모 한 장으로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다. 돈을 주었다는 말과 받지 않았다는 말들이 상황에 따라 변질되기도 하고 서로 교차하며 난무하고 있다. 그 사람은 가고 없으나 그가 남긴 말은 핵무기 같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 그건 아무래도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이 무섭다.
언중유골이라 했으니 말에 뼈가 있는 법이고, 그 뼈는 가시가 되어 사람을 찌르기도 하고 튼튼한 뼈대가 되어 큰 교훈을 주기도 한다.
불손함 없는 추상같은 기개가 넘치는 말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