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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젖은 빵

등록일 2015-03-13 02:01 게재일 2015-03-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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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 편집국장

괴테는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한마디로 고난과 역경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얘기다.

얼마 전 재미교포 프로골퍼 제임스 한(34)이 프로 데뷔 12년 만에 처음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는 소식은 내게 `눈물젖은 빵`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2003년 프로 데뷔를 한 제임스 한은 대회에 출전할 여유가 없어 백화점 구둣가게와 광고 회사, 골프용품에서 일을 해 출전 경비를 마련했다는 일화를 남겼고, 이런 사연들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여자프로 골퍼 신지애 역시 눈물젖은 빵을 먹고 성공한 경우다. 수년 전 모 방송프로에 나온 신지애는 개척교회 목사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생활조차 어려웠던 시절의 얘기를 눈물과 함께 털어놓기도 했다. 신지애는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난 후 받은 `눈물의 보험금`으로 골프를 계속해 세계 여자프로골프계를 석권하는 성공을 이뤄냈다.

눈물젖은 빵과 함께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는 언제나 감동으로 이어진다. 지난 해 종편채널에서 방영된 서민갑부 박영수씨와 김기성씨 역시 바로 `눈물젖은 빵`의 주인공들이다.

박영수씨는 경남 창원에서 손짜장면을 전문으로하는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는 데, 점심시간마다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뤄 연간 7~8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대박중국집 사장이다. 한때 삶의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던 그는 손짜장면에 가장 중요한 수타기술을 배우기 위해 짜장면집 직원으로 들어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성공을 이뤄냈다.

신발수선으로 인생역전을 이뤄낸 억대 연봉의 사나이 김기성씨도 과거 일확천금을 바라며 방독면 마스크사업, 앙고라 토끼분양사업, 커피필터 사업 등을 벌였지만 손대는 것 마다 줄줄이 실패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마흔 네살 이후 허황된 꿈을 접고 신발 수선 일을 택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0년동안 365일 하루도 쉬지않고 일한 그는 지금 국내외 최정상 브랜드 등산화를 수선하는 억대 연봉의 사나이가 됐다.

정치지도자 가운데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쉬진핑 중국국가 주석이 눈물젖은 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박근혜는 아홉 살에 대통령의 딸이 됐고 그 위상은 18년 동안 지속됐다. 아버지가 피살된 후 청와대를 나와 권력이 없는 생활을 시작했는 데, 은둔하다시피 한 생활이 18년 동안 이어졌다. 전 대통령의 딸로서 사회적인 위상도 있었고,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배신으로 박근혜는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던 중 정치에 입문해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소신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선거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시진핑 중국국가 주석이 1953년 태어날 때 아버지 시중쉰은 서북지방 당·정·군 책임자로 공산당 실세였다. 그래서 1950년대 중국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죽던 시절에도 귀족처럼 지냈다. 그러나 시진핑이 아홉 살이던 때 아버지 시중쉰이 반당분자라는 모함을 받아 연금됐고, 13세가 되던 해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쳐 서북지방 산골마을로 하방(下放)됐다. 그는 철저하게 바닥까지 떨어져 오지 마을 주민과 똑같이 요동(窯洞)이라 불리는 동굴생활을 해야 했다. 농사일은 중노동이었고, 더 힘든 건 이와 벼룩이었다.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긁어대는 바람에 당시 시진핑의 피부는 피투성이였다고 한다.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쳤던 시진핑은 고심끝에 다시 오지로 돌아가 기층 민중으로 태어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후 시진핑은 6년 만에 지방 공산당 요원이 됐고, 승승장구해 마침내 국가주석의 자리에 올라 중국을 움직이는 사람이 됐다.

성공을 원하는 당신! 지금 당신앞에 있는 `눈물젖은 빵`을 기꺼이 씹어 삼키라. 날이 밝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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