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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우 화백 30년 예술세계 감상하세요

정철화기자
등록일 2015-02-09 02:01 게재일 2015-02-09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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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 30여점 한자리에 모아 기획전시회…DGB갤러리 13일까지
▲ 故 최영우 화백 생전의 작품활동 모습.

경주 출신으로 서양화가 고 최영우(崔泳佑) 화백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DGB갤러리(대표 금철현)는 오는 13일까지 서양화가 최영우(1932-2010) 유작들을 한 자리에 모아 기획전시회를 연다.

최영우 화백은 지난 1970년대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작품 활동을 펼쳐 왔지만, 지병으로 작고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작품전은 가져보지 못했다. 그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수많은 유작들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이번 전시회는 최영우 화백의 생전에 남긴 유화 작품을 비롯해 수묵화 드로잉 등 30여점의 유작들이 처음으로 선보인다.

▲ 최영우 作 `이상`
▲ 최영우 作 `이상`

최 화백은 1932년 경주 효현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 가족이 일본 큐슈지방으로 이주했다가 해방과 함께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가정을 이룬 뒤 포항 구룡포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건축업에 종사했지만 이내 사업을 정리하고 서른여섯의 늦은 나이에 건축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대구교육대학의 교육공무원으로 임용됐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1960년대에는 시내 극장 간판에 배우들의 멋진 모습들을 그리기도 했던 그에게 미술학과가 있던 교육대학의 생활은 잠재돼 있던 미술적 재능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경험했던 최영우는 이 경험들을 그림 속에 녹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큐슈지방에서의 초등학교시절 익혔던 미술기능이 전부였던 그가 자그마한 캔버스에 가득 채워 넣은 건 앵포르멜 양식의 추상화였다.

▲ 최영우 作 `불사조`
▲ 최영우 作 `불사조`

당시 서울, 대구 등에서는 전통회화의 표현양식과 결별하고 새로운 미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통한 경험 했던 참담함과 절실함과 가난으로 인해 기울어졌던 가세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시작했던 건축사업의 부진과 실패가 안겨준 좌절감을 형식의 관례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 분출해 내기에는 앵포르멜 양식만한 것이 없었다.

대상에 대한 묘사나 별다른 표현력을 요구하지 않고 비정형과 반 형식을 추구했던 앵포르멜은 최영우에게 미술에 입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었다.

1992년 정년퇴임과 함께 다시 경주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노년기 예술가들이 여생을 즐기며 지내는 한가로움 보다는 이제 막 미술에 입문한 미술학도처럼 아카데믹한 표현양식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익히려는 모습으로 일관된 생활을 보냈다.

고향집을 현대식 단층 건물로 증축한 후 `산가옥 화공방(山佳屋 畵工房)`이라는 현판을 달고 작업실을 겸한 아담한 생활공간으로 꾸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투병 중에도 틈만 나면 캔버스 앞에 앉아 고향집 앞마당의 정겹고 따스한 기운을 화폭에 담아냈다. 그래서 말년의 풍경화 작품 뒷면에는 그의 이름대신 고향마을인 `현곡(峴谷)`을 아호로 남겼다.

이번 유작전을 준비한 유족 최민애(초등학교 교사)씨는 “누구보다 미술을 좋아했고, 한 평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가까이 했던 아버지의 유작들은 이제야 한자리에 모아 전시회를 열게 되어 너무나 죄송스럽다. 좀 더 일찍 세상에 아버지의 예술세계와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었지만, 작품 수준과 비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순수했던 아버지의 예술정신이 가볍게 취급될지 몰라 오랜 시간 망설였다”고 말했다.

/정철화기자

hhjeong@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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