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호주머니 속엔 쥐돌고래 한 마리 살고 있지요. 푸읏푸웃 머리엔 언제나 시든 제라늄 화분 하날 얹고. 놈은 하릴없이 뒷골목을 배회하거나 어디 공짜로 삼킬만한 멸치 떼가 없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게 일상이지요. 녀석이 우울할 때마다 혓바닥을 긁어주거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지만. 삶이란 게 그렇지요. 그건 온전히 자신만의 몫이니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겠어요. 둘러보세요. 지금 누군가 호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당신 옆을 스쳐간다면 그는 분명 돌고래 한 마리를 키우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면 범고래거나 흰수염고래일지도 모르지요.
아침마다 호주머니 속 쥐돌고래를 꺼내 굽은 등을 펴고 지느러미를 닦아주지요. 그럴 때마다 놈은 비장한 각오를 다지지만, 그건 이미 바람 빠진 부레나 다름없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지요. 비호처럼 생선을 낚아채던 이빨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무디어진지 오래이고요. 비로드처럼 매끈한 피부는 주름살이 물결을 이뤘고 세상 끝까지 헤엄쳐갈 것 같던 지느러미는 녹슬어 작은 파도에도 삐걱거리기만 하지요. 풍랑주의보의 거친 바다를 헤엄쳐 다니던 그 위풍당당한 정신의 콧대는 어디로 간 걸까요?
가끔씩 놈은 뒤통수를 긁적여 낡은 화분 하나를 끄집어내지요. 마술사가 장미나 비둘기를 꺼내듯. 그건 녀석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지요. 그러나 제라늄 한 송이가 어떻게 태산 같은 슬픔을 위로할 수 있겠어요. 한때는 그 제라늄이 분수처럼 형형색색 춤을 추고 물방울보석들이 루미나리에처럼 밤하늘을 수놓을 때도 있었지요. 그땐 삶이 얼마나 희열에 차 있었고 미래가 가슴 부풀었는지. 이젠 다음 장이 다 보이는 카드놀이처럼 시들해버린 지 오래지만요.
먹일 찾아 낭떠러지로 질주하는 스프링복처럼 놈은 종일 도시의 변두리를 회유하지만 기껏 구름의 뒤통수나 좇는 게 일쑤. 부리의 기억을 잃어버린 이 이빨고래아목의 포유류는 사랑을 고백하는 꽃도 되지 못하고 제 등을 갈라 사막의 내게 물 한 모금 축여주지 못합니다. 순한 들쥐의 주둥이를 유전(遺傳)한 잿빛 몽유는 그러므로 무지개가 아닙니다. 불멸은 더욱 아니지요. 수평선을 꿈꾸지만 단 한 번도 심해에 닿아본 적 없는, 쓸쓸한 은유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나는 오늘도 오거리에서 육거리로, 시장에서 역전으로 샛바람처럼 떠돌지요.
가끔씩 그물에 걸리거나 해안가에 떼를 지어 난파된 녀석들의 소식을 듣곤 하는데요. 돌고래의 지능지수는 유아정도 수준이라는데 녀석들의 죽음이 때때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호주머니 속 쥐돌고래를 유기해버렸거나 삶에 지친 쥐돌고래들이 스스로 그 아스라한 삶의 끈을 놓아버린 때문이 아닐런지요. 어쩌면 물질만능의 이 부조리한 사회적 현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지요.
장미는 보도블록 위에서, 색색의 풍선을 들고 가던 아이들은 뒷골목에서 일찍 시들어버린 지 오래. 누군가는 아파트 아래로 투신하고, 또 누군가는 신용불량의 내일을 하수구에 폐기하고.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은 언제나 죽은 물고기처럼 떠밀려오지요. 지금은 눈 먼 새들이 제 몸을 쪼아 먹는 흉어기…. 그래도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오늘도 호주머니 속에 놈을 쑤셔 박고 귀가하지요. 투덜거리는 입속으로 썩은 청어 몇 마리 던져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