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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전인수(我田引水)`의 늪

등록일 2014-08-19 02:01 게재일 2014-08-1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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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휘 서울본부장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든, 두 번의 충격이 있다. 영화 `명량`에 몰려드는 관람객의 범람과, 2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바티칸의 교황 `프란시스코` 신드롬이 그것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불과 12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들이닥친 왜군을 깨부순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소재로 다룬 `명량`은 이미 관객 수가 1천500만으로 치달으면서 모든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1천8백만의 어마어마한 관객동원을 예상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지난 14일 방한해 4박5일 간의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은 소탈하고 겸손한 행보로 한국 천주교신자는 물론 일반인까지 감동시켜 `교황앓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교황은 급속한 경제발전이 초래한 배금주의가 빚어낸 잇단 비극 속에서 슬프고 외롭고 혼란스러운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와 용기의 씨앗을 퍼트리며 큰 숙제들을 남기고 떠났다.

영화 `명량`이 히트를 치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극장을 드나들었다. 이어서 교황 프란치스코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연일 전해지는 그의 언행에 담긴 뜻을 헤아리느라고 분주했다. `명량`을 감상한 정치인들은 저마다 어떤 감회들을 느끼고 깨달았을까. 또 그들은 프란시스코 교황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어떤 지혜를 찾아냈을까. 간간이 비쳐지는 반응들을 살펴보면 똑 같은 것을 보고 듣는데도 저마다 느끼고 깨닫는 일이 참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

철저하게 아전인수(我田引水)다. 백성들과 군사들이 모두 다 절망에 빠진 처참한 상황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며 자신의 목숨을 배수진 쳐놓고 솔선수범으로 승전을 일궈나가는 이순신 장군을 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혹여 그동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나라`보다는 `패당(牌黨)`온존에 대한 열망만 키우지는 않았을까. 무한정쟁을 벌이는 동안 굳어진,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고질병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기미는 아직 없다.

우리 정치권이 늘 그래왔듯이, `나만 옳다`는 아집을 버리지 않는 한, 나와 다른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일은 불가능하다. `양보`의 의지가 없이 마주 앉아 시작하는 대화는 십중팔구 언쟁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세월호특별법 합의가 뒤집어지는 해프닝에 얽힌 모순도 그렇다. `전권`을 부여받았다는 박영선 위원장이 일궈낸 합의가 맥없이 무산되는 모습을 보면서 적지 않은 국민들은 `전권(全權)`이라는 말뜻이 헛갈려 사전을 다시 뒤졌을 것이다.

국회는 `국회선진화법`에 꽁꽁 발목이 잡혀 있다. 이상적인 국회를 위해서 국회선진화법의 입법취지는 백번 옳다. 그러나 이 법의 타당성은 어디까지나 절차에 대한 `다수`와 `소수`의 의지가 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대전제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에 대하여 `다이어트`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놓은 날씬한 가죽점퍼에 비유한다. 정치인들이 치수 작은 가죽점퍼를 쳐다보면서도 다이어트를 실천하지 않고 놀고먹는 한, 민생은 여전히 춥고 배고프고 어지러울 따름이다.

`명량`에서 감동한 이순신 장군의 `용기`를 정치적 편견의 골을 더욱 깊이 파는 도구로 쓰지 말기를 충언한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남긴 `화합`·`사랑`·`용서`·`배려`·`평화`·`용기` 등 귀중한 화두들을 놓고, 부디 정치인들이 `제 논에 물대기`식 해석을 덧붙여가며 정쟁의 의욕을 키워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목전에 걸린 `세월호특별법`이나 긴요한 민생법안 앞에서, 크고 순수한 교황의 계시를 견강부회하여 아집의 부피를 늘리는 몰상식은 결단코 피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과제로 두고 떠난 `평화`를 정파적 주장의 불길을 키우는 부채로 쓰지 말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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