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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멱

등록일 2014-07-25 02:01 게재일 2014-07-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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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식시인
매미소리가 촤르르, 촤르르, 등멱을 합니다. 더위 먹은 운동장이며 이팝나무며 아파트옥상들이 연신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 여름 한낮이 얼음물처럼 시원해집니다. 나는 할머니 앞에 웃통을 벗고 엎드립니다. 쫘-악! 허리춤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차가운 물 한바가지 쏟아집니다. 사막 같은 등짝으로 수천 개 오아시스가 흘러내립니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어, 추워, 어, 추워” 연신 소리를 지릅니다. 할머닌 “사내 자슥이 이것도 못 참으모 우짜노” 짐짓 나무라며 다시 물 한바가지를 어린 손자 등에 흩뿌립니다. 그러면 나는 더 호들갑스럽게 춥다며 엄살을 떱니다. 공터 감나무에선 연신 매미가 울어대고 온 몸에 달라붙어 있던 더위들이 한꺼번에 우물가로 씻기어 내려갑니다.

여름 한낮에 땀을 식히는 방법으론 등멱이 단연 최고였습니다. 달콤한 아이스께끼며 수박이 있었지만 등물의 짜릿함을 대신하진 못했습니다.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서늘함으로 지친 몸이 다시 제 기능을 찾는 순간이 등멱입니다. 여름이면 이 집 저 집 등물 치는 소리가 담장너머로 파도처럼 출렁거렸습니다. 어느 시인은 등멱하는 아낙의 고욤열매 같은 젖꼭지를 훔쳐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애로틱하게 고백했지요. 그러나 근래엔 그러한 풍경을 보기가 좀체 어려워졌습니다. 주거환경이 바뀌고 에어컨이 등장하면서 등멱을 하는 정서가 점차 사라진 때문일 것입니다.

타자에게 슬쩍 등을 내밀어주는 일, 그 내민 등에 잠시 사랑하는 이의 체온이 건너오는 일, 물을 매개로 살갗과 살갗이 따뜻하게 만나는 일, 그것이 등멱의 시간입니다. 등멱은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 샤워와는 그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혼자 하는 샤워가 폐쇄와 단절의 문화라면 등멱은 개방과 소통의 문화입니다. 대개 그것은 가족 간처럼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이뤄지는 것이라 더 친근감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피서 법은 은은하고 정겨웠습니다. 등멱 뿐 아니라 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피했다는 탁족(濯足)이 있습니다. 바람을 불러 모으는 부채도 있고요. 나무그늘아래 평상을 내어놓는 일은 또 어떻고요. 기계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의 일상이긴 하지만 멋과 정이 담긴 자연친화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 어른들의 지혜가 스며든 소중한 풍습들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발가락을 간질이는 송사리 떼며 합죽선이 일으키는 은은한 바람이며 그늘을 풍덩풍덩 길어 올리는 느티나무 아래가 한층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더위가 삶이라면 등멱은 위로일 것입니다. 노동과 수고와 피로에 대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휴식의 한 형태가 등멱이지요. 살면서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 같은 부조리한 상황과 대면할 때가 가끔 있지요. 그럴 때 힘든 우리 곁에 다가와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는 등멱 같은 위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우린 또 절망의 한 순간을 이겨내는 힘을 가지겠지요.

소나기가 쏟아지려는지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집니다. 그러고 보니 연일 폭염경보가 내려 온갖 사물들이 더위에 지쳐 있는 요즘입니다. 비가 오려는 걸 예감한 골목이며 들판이며 먼 산들이 일제히 웃통을 벗고 제 등을 내놓느라 부산합니다. 제대로 한번 등물을 뒤집어쓰겠다는 자세입니다. 지금쯤 소나기는 구름 속에서 회심의 물 한 동이 뿌릴 궁리를 하는 중일 테지요.

생활에 쫓겨 정신없이 달려온 나도 참 오랜만에 등물을 받는 자세가 되어 봅니다. 불현듯 천둥소리 사이로 할머니가 나타나 “사내 자슥이 그것도 못 참으모 우짜노” 호통 치면서 냅다 물 한 두레박 뿌려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고단한 내 삶도 잠시 위로를 받겠지요. 사방이 푸른 물소리로 출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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