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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여성 지도자

등록일 2014-07-18 02:01 게재일 2014-07-1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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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연화중원대학 교수·화가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0년간 한국 여성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는 가시적 객관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변화들은 뚜렷하게 포착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이 많아지고 상승됐음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표적 예로 우리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취임한 사실이다. 여성이 최고 권력을 쟁취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 각국에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중국의 서태후, 그녀는 비록 황제는 아니지만, 그와 버금가는 지위로 청나라 말기의 최고의 권력자이며 `역사상 최고의 악녀`로 불리는 유명한 여인이 아닌가? 그녀는 큰 야망과 사치가 무척 심해 청나라가 망한 게 그녀의 사치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면 옷이 2만 여벌이나 되고 비취와 진주 등 보석에 대한 애착도 대단해서 머리장식은 물론이고 손톱까지 보석으로 장식했으며, 한 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는데 하루 식사비만도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당시 이 돈으로 5천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1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또한 아주 거짓 투성이었는데 그녀의 사치 극치는 이화원을 만든 것이 아닌가. 물론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말이다. 궁녀와 내시, 대신들은 그녀를 무척 무서워했으며 그녀의 사치와 잔인함은 극에 달한다. 하지만 사치와 권력에 집착했던 서태후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한말이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 했다니 참 아이러니 하다 하겠다.

서태후가 청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영국에서도 빅토리아라는 여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여성 통치자라도 빅토리아 여왕과 서태후가 걸어간 길은 극과 극이었다. 서태후가 나라를 개인 욕심의 과다로 망치는 동안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재국으로 만들었다. 19세기는 `영국의 시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상 화려한 시기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성장기를 보면 하늘의 계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가 왕으로 즉위하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왕위에 올라 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정을 운영해 나갔는데 이때 남편 앨버트공의 도움이 매우 컸으며 사려 깊고 학식이 높았던 남편은 그녀가 편협한 사고를 갖지 않도록 끊임 없이 일깨워 줬고 외교 재정 등 모든 부문에서 항상 논의 하며 도움을 줬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매우 사랑했고 남편이 죽자 평생 검은 옷만 입으며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았으며 긴 40년 동안 미망인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녀의 타고난 온화함과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겠지만 즉 인복이 참 좋은 여왕으로 평가된다.

이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1년 넘은 기간의 시간을 집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에게는 그를 도와줄 남편도, 대신들도 없어 보이는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려운 시국에 비난의 목소리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때가 아닌가 싶다.

위 동서 여성통치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뽑은 첫 여성대통령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생각 해 볼 문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산하나 국회의원, 공무원, 기업인, 교육자 모두 스스로 부정부패의 고리와 단절하고 나라와 이웃에 진심으로 배려하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부흥`을 위해 여성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나로 단결, 후대 역사가들이 훌륭한 대통령과 정치인, 백성들에 의해 부강한국, 통일한국이 이뤄졌었다고 당당히 기록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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