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의 눈 덮인 산에는 `할단새`라고 하는 전설의 새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새는 둥지 없이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면서 사는데 밤이 되어 추워지면 몸을 웅크리고 밤새 추위에 떨면서 `내일은 꼭 집을 지어야지`하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아침이 되어 따뜻한 햇볕이 비치면 간밤의 결심을 잊어버려 평생을 집 없이 후회만 하면서 살아가는 망각의 새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안전 불감증과 적당주의의 잘못된 관행을 버리지 못하면 재난은 늘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경종일 것이다.
재난은 언제 찾아올지 알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내일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면서 오늘을 살아간다면 늘 후회만 남게 된다. 지난 2월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로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지 채 두 달이 되기 전에 일어난 이번 진도해역의 참사도 결과적으로 한국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됐다. 안전을 등한시하는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서 재난 위험이 높아진 것은 물론 재난 대응 능력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10여년전 대구 지하철 사고의 기관사나 세월호 선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대피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으로 피해가 커졌다. 기관사는 승객들을 객차에 가둬둔 채 마스터키를 들고 현장을 떠났다. 세월호의 60대 베테랑 선장은 손자뻘의 어린 고등학생 등 승객들을 내버려둔 채 속옷만 입고 허둥지둥 배에서 맨 먼저 탈출했다. 기관사와 선장의 이와 같은 이기적인 행동은 우리사회의 리더들이 보여주는 무책임의 전형이다. 모든 조직에는 체계에 맞는 지위와 역할이 있다. 지위만 누리고 역할에 맞는 책임은 방기한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선조는 비가 오는 캄캄한 밤 백성들을 뒤로 한 채 몰래 도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압록강 앞 의주까지 달아났다. 이 때 선조의 몽진 길을 호종(扈從)하던 사관들이 짊어지고 다니던 사초(史草)를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도망가는 바람에 선조가 즉위한 후 임란이 일어나기까지 25년간의 사적이 깜깜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후금군이 쳐들어오자 한양의 수비는 세자에게 맡기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떠났고 적군을 맞아 조국을 구한 것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이 의정부를 점령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이 서울에 있으니 안심하라 하고서는 정작 본인은 다음날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난하며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서울을 지킬 수 있다는 대통령의 호언장담을 믿었던 순진한 국민들만 목숨을 잃었다. 침몰 직전까지 선원들은 승객에게 `객실에서 기다려라`를 반복했다. 이 말을 철석같이 믿은 말 잘 듣는 어린 학생들과 승객들만이 아직도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누워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지는 안보와 안전이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겠다며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꾸고, 재난 관련 지휘 책임을 안행부에 줬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은 무능이 아니라 백치의 수준과 다름이 없다. 사고야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모습은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낀다.
신속하고 정확한 보도를 생명으로 여기는 언론 또한 시청률에 노예가 되어 자극적인 표현과 오보로 국민들을 아노미 상태로 몰아갔다. 한 방송사의 인터뷰는 이제 막 죽음의 문턱에서 탈출한 어린 학생에게 “친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라고 물었고, 학생은 울음을 터트리며 “못들었다”고 대답했다. 기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사회 전반에 쌓이고 쌓인 적당주의와 준법정신의 결여가 만들어 낸 안전불감증에서 온 결과다. 뼈저린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집단이나 개인은 망할 수밖에 없다. 소 잃고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소중한 소를 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