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 산다는 것` 강은교·정끝별 외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328쪽
강은교, 권혁웅, 김언, 박정대, 박주택, 박형준, 손택수, 신현림, 여태천, 유홍준, 이기인, 이민하, 이승희, 이영주, 이재무, 장석주, 정끝별, 정병근, 정호승, 허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이 모였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실험시까지, 다양한 시의 면면만큼이나 필자들의 구성 역시 다채롭다. 이들이 시를 처음 접한 계기는 무엇이고, `천형`이라는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계기는 무엇일까? 서정시만큼 아련하고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을까? 전통을 깬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시만큼이나 놀라운 것들이 존재할까?
`시인으로 산다는 것`(문학사상사)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한데 모은 책이다. 특히 시인으로서의 삶과 창작론에 대해 쓴다는 큰 틀 외에는 형식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시인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쓴 20편의 글들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시인들이 시에 대해서 생각해온 것, 이제 시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모아보는 자체만으로도 21세기 초반 우리 당대의 시에 대한 생각을 함께 증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개성 넘치는 에세이집인 동시에, 시인을 꿈꾸는 미지의 후학들에게 문학적 지평을 확장해주는 지침서가 돼줄 것이다.
책머리에서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특별한 재능이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의 호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은 `집 가(家)`를 쓰고, 가수 목수 등은 `손 수(手)`를 쓴다. 그런가 하면 의사 교사 목사 등은 스승 사(師)`를 쓰고, 변호사 박사 회계사 등은 `선비 사(士)`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같은 문학 분야에서도 작가 소설가 평론가처럼 시가(詩家)라 하지 않고 `사람 인(人)`을 써 시인(詩人)이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시를 아름답고 초월적이며 고매한 정서의 표현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름답다`의 어원이 `앓다`이듯, `글`의 어원이 `그리워하다`이듯, 아름다운 시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세상을 온몸으로 앓고 사랑한 이의 가슴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아름다운 시가 때로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시인이 자기 내면의 혼란과 진흙탕 같은 세상의 부조리를 힘겹게 뚫고 올라와 승화시킨 결과가 그 시이기 때문이다. 말(言)로써 절(寺)을 짓는 사람(人), 그가 바로 시인(詩人)이다.
이 책에는 시인들이 습작생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현재 시인으로서 겪는 솔직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왜 시를 쓰는지, 왜 시를 쓰려고 하는지, 왜 시를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을 만든다. 끝이 보이지 않고 정해진 답도 없지만, 이것은 시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시는 기도에 가깝고 혁명에 가깝다. 기도에 가깝지만 인간과 시대에게로, 혁명에 가깝지만 언어와 저기-너머로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를 얻기 위해서는 안 보이는 간절한 것들을 감각하라, 그리고 의심하고 물어라. 안 보이는 간절함에 천착하고 그 간절함에 대해 되물어라. 그것이 사랑이든 시간이든 죽음이든, 유토피아든 신념이든, 돈이든 밥벌이든 사람살이든, 새롭게 인식하고 감각하기 위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정끝별―시는 어디서 오는가)
이 책은 시를 쓰는 사람에겐 어떻게 시인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침반이며,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지 일러주는 동시에 시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좋은 지침서다. 모처럼 시인들의 향기로운 시와 흥미로운 삶 이야기에 한껏 취해볼 기회다. 읽는 이 모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