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를 종종 `카지노 경제`에 비유하곤 한다. 특히 서유럽인들의 눈에 비치는 미국은 더욱 그러한 경향이 짙다. 물론 서유럽인들도 미국이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임을 인정하고 배울 것은 배우려고 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천박한 자본주의를 말할 때는 미국을 빠뜨리지 않으며 미국의 발전에는 언젠가 한계가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세계적인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베버는 파리아(Paria)를 인용해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파리아는 천한 계급을 가진 최하층민을 뜻한다. 주변의 어려운 상황과는 아랑곳없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빨아들이는 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미국의 엘리트들이 실력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부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메리카 대학 경제학과 교수 헤르츠도 이 같은 세습 현상은 미국이 독일, 프랑스나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10배 이상이라는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능력에 따른 계층 간의 사회적 이동이 활발하지 못하고 부모를 잘 만나는 행운이 사회적 신분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좁은 문을 향해 올인 하지만, 거의가 하층민으로 떨어지는 미국은 더 이상 기회 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구태여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미국은 유럽인이 보기에 그래서는 안 되는 교육마저 지나치게 상업화시켜 이윤을 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세계 도처에서 몰려드는 사람 중 기회를 잡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일 뿐인데도 그러한 이야기가 성공 신화로 포장돼 다시 대중으로 퍼져간다며 비판적인 눈길을 준다.
미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비판적인 시각은 이처럼 일단 교육 시스템에서 드러난다. 서유럽의 대학이나 기타 유사한 교육기관에는 내국인·외국인 할 것 없이 영업적인 등록금이 없다. 교육수혜자 당사가가 아닌 일반 세금으로 충당된다. 일부 국가의 대학에서 수수료 정도가 부과될 뿐이다. 독일도 수수료 정도의 등록금이 잠시 부활했다가 올해부터 니더작센주(州)를 마지막으로 종전처럼 등록금이 사라졌다.
물론 대부분 학문에 흥미와 소질이 있는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지만 너 자식 내 자식 할 것 없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공동의 미래자산으로 여기기에 세금으로 공부시키는 시스템을 유지한다. 예체능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제대로 키우려면 우리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며 서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서유럽 선진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스위스의 경우 예체능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면 `게마인데`(동사무소와 유사한 행정단위)에서 공적비용을 지불하며 소질을 개발시킨다.
자라나는 세대들은 사회 공동의 자산이라는 개념이 일상화 돼 있는 셈이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사회안전망이라고 부르지만 그들만의 `사회적 울타리`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유럽인들은 한국을 두고 `작은 미국`이라고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전적으로 옳은 판단은 아닐지라도 부인하기도 어렵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생존을 위협하는 생활고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만 봐도 그렇다. 더구나 어린자식을 동반한 안타까운 자살 사건들이다. 어린자식은 개인소유물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미래 자산이다. 피어나지 못한 꽃이 아니라 봉오리도 채 맺지 못한 대한민국의 어린자식들이다. 있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선택을 한 부모들도 안타깝지만 우리들의 사회적 울타리를 믿지 못하고 행한 동반자살은 우리들을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일반적인 양극화 현상은 어디서나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단적인 양극화는 결국 천민자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들이 쌓아가고 있는 `사회적 울타리`의 현주소를 가늠케 하는 사건이라서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