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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4

등록일 2014-01-16 02:01 게재일 2014-01-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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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지난해 12월 대구예술발전소에서는 뜻 깊은 전시와 학술행사가 마련되어 지역미술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대구(大邱)`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아이콘 중 미술이 주는 비중도는 그 어느 분야보다 월등하다. 우리나라에 `서양화`라는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부터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대구의 지역적 특징이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고, 나아가 197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발상지로 재도약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는 아름다운 추억속의 기억만을 쫓아가는 회고전 성격에서 벗어나 신선한 충격과 자극제 역할을 했다. 서구의 조형적 사고와 표현방법이 이 땅에 새롭게 소개되며, 우리의 삶과 시각적 감각능력을 새롭게 변화시킨 수많은 작가들과 전시에 관한 새로운 해석과 재조명은 아마도 동시대 미술인들과 비평가들이 책임져야 하는 당연한 의무와 책임인지도 모른다. 1974년을 기점으로 5차례 펼쳐졌던 `대구현대미술제`는 70년대는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이 싹트면서 다양한 시각에서 개인과 단체의 현대미술 활동이 태동한 시기로, 그 중심에 대구현대미술제가 있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다. 서울을 비롯해 대구의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다함께 참여하고, 그 당시 유행처럼 표현되어진 다양한 추상미술들과 퍼포먼스(행위예술)는 불안했던 시대적 상황을 예술로 표현하기 위한 작가들의 또 다른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예술의 변화를 주도했던 1974년을 전후해 일어났던 국내의 주요 사건들을 간략하게 회상 해 본다.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3선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는 근대화와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정점이 바로 1970년대였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에게 긴급조치권을 발동하고 인민혁명당 재건사건을 조작하는 등 탄압을 이어가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던 때이기도 했다. 1972년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유신헌법 공포와 긴급조치 1, 2, 3호 발표를 통해 살벌한 정국을 이어 갔으며, 급기야 1974년 8월15일에는 재일 한국인 문세광에 의해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하고, 이 일로 인해 육영수 영부인이 현장에서 서거하는 어처구니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5년 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였던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마저 총탄에 서거하자 국민들은 멘붕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70년대만큼 국내정세가 급변하고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졌던 때도 드물 것이다. 1971년 1월에는 동해에 해일 일어나 22명이 사망하고 2천754명의 실종과 이재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해 3월에는 포항에 5명의 무장간첩이 나타나 검거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인천 실미도 특수부대원 24명이 서울로 진입을 기도했던 사건도 그 해 8월에 발생했다. 정국 불안 속에서도 홍수환은 WBC밴텀급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쟁취해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TV인터뷰를 통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라는 홍수환의 외침은 신종 유행어로 한동안 인기몰이를 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는 또 다시 예술을 반영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예술의 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술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곧 세상이 던지는 수많은 충격과 자극이 고스란히 예술로 담겨진다는 뜻으로 재해석 되어 진다. 동서양의 오랜 역사 속에서 함께 해왔던 예술은 시대의 사상과 철학 현실의 반영을 통해 그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새롭게 상징되어진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라는 수많은 조형적 요소들은 이러한 시각에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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