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꼴을 보니 또 물 건너가는 게 아닌가 싶다. 정치권에서 한창 논의중인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얘기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후보 모두가 기초선거 정당공천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는 데도 올해 6·4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 폐지문제가 어떻게 될 지 예측이 어렵다. 새누리당이 느닷없이 정당공천 폐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초의회 선거폐지를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제도 개선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당헌·당규개정특위는 최근 6월 지방선거에 앞서 지방정치와 지방행정의 불합리한 제도를 전면적으로 쇄신키로 하고, 현행 3연임인 광역단체장 임기의 2연임 축소, 특별·광역시의 기초의회(구의회) 폐지, 광역단체장-교육감 러닝메이트제 또는 공동후보등록제 등 지방자치제도 개선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정당 공천 폐지 논란에 휩싸인 기초의회를 아예 특별·광역시에서 없애는 방안이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는 기초의원의 정당 공천을 폐지하는 공약을 나란히 내걸었지만, 아예 발상의 전환을 통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온 기초의회 자체를 구의원부터 단계적으로 폐지하려는 시도다.
기초의회는 기초의원들의 자질 문제와 수없이 되풀이된 토착 비리 사건, 기초단체장과의 유착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광역의회와의 업무 중복성 때문에 `옥상옥`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사실 여당이 주장하고 있는 구의회 폐지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0년 국회 행정체제개편특위가 구의회 폐지안을 담은 `지방행정체제 개편특별법`을 냈지만, 구의원들은 물론 이해가 얽힌 일부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바 있다. 여권은 급격한 개혁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을 고려, 우선 7개 특별·광역시의 구의회부터 폐지해보고 나서 대상을 확대한다는 복안이다. 여권 관계자는 “광역의원들이 기초단체장을 충분히 감시할 수 있다”면서 “기초의회 의사당을 따로 두고 기초의원을 선출하고 운영하는데, 막대한 혈세를 쏟아붓는 것을 대부분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야당의 반응은 시니컬하다. 민주당 전병헌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의 지방자치제도 개선안에 대해 “대선 공약이었던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요구를 물타기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박기춘 사무총장도 “정당공천 폐지 주장에 대해서도 지방선거 전까지 시간이 부족하다는 반대 목소리가 나오는데,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한 기초의회 폐지는 가능하겠는가. 여당의 주장은 전형적 물타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지방의회 공천 폐지에 대한 새누리당의 설명 역시 옹색한 변명처럼 들린다. 국회 정치개혁특위 소속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방송에 출연, “정당공천 폐지 시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 권리보호가 어려워지고, 후보가 난립해 검증이 제대로 안되며, 협동조합 등에서 비롯된 유사 정당이 많아 정당이 역차별을 받을 수 있다”고 정당공천 폐지 반대입장을 보였다.
지방의회 정당공천 폐지로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의 정치적 진출이 문제되면 여성명부제, 동반당선제 등을 도입해 보완하면 된다. 후보 난립 문제 역시 매니페스토 운동을 펼쳐 정책선거 분위기를 만들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여당인들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굳이 기초의회 폐지를 들고나선 여당의 속셈은 뭘까.
바둑에서 `기자쟁선(棄子爭先)`이란 말이 있다. `알을 버리더라도 주도권은 잃지말라`는 뜻이다. 싸움에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수세에 몰리면 방어에 급급해지고, 빈틈이 노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의 해, 기초의회 정당공천 폐지를 당론으로 정한 후 공세를 취해온 야당에 대한 대응이 무척 궁색했던 여당이다. 그 와중에 나온 `기자쟁선의 계`는 하나의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어떤 신산묘책도 민의나 천심을 거슬러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