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 열풍이 일고있다. 지금으로부터 118년전인 1895년 10월 8일 새벽, 왜인들이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경복궁 건천궁에서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사건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바로 명성황후다.
지난 1995년 명성황후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뮤지컬 `명성황후`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600여 벌의 궁중의상과 스펙터클한 무대,`백성이여 일어나라`로 대표되는 웅장한 선율을 관객들에게 선사하며 단기간 내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수립했다. 이후 명성황후는 18년간 장기공연되며, 2007년 국내 최초 대형 창작뮤지컬 100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2009년에는 1천 회 공연을 돌파하며 오랜 기간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난 1997년에는 뮤지컬의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의 심장부에 위치한 링컨센터에서 공연하며 높은 객석 점유율과 기립박수 속에 대성황을 이뤘다. 2010년에는 창작뮤지컬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을 다진 공로를 인정받아 공연예술 부문으로는 유일하게 국가브랜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뮤지컬 명성황후는 `역사의 교훈을 잊은 민족에게는 발전이 없다`는 뼈아픈 지적을 다시 새겨보게 하는 뮤지컬이다. 요즘과 같이 일본이 독도영토 분쟁을 야기시키고 역사교과서 망언 등을 스스럼없이 일삼고 있는 현실에서는 오욕의 역사를 새기며 분발하자는 의미도 적지않다.
그래선지 지난 주말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중인 대구 계명아트센터는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은 가족단위의 관객들로 붐볐다. 오후 7시 공연시간이 되자 서곡과 함께 막이 올랐다. 비행기 소리가 들려오면서 무대 상공으로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한반도의 일제 강점기를 끝내게 만든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면서 연도가 1945년부터 거꾸로 흘러 1896년에 멈추어지고, 히로시마 지방법원에서 열린 일본인들의 `민비 살해` 공판으로 뮤지컬 `명성황후`는 시작됐다.
이어 고종과 민자영이 혼례를 올리는 장면부터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되던 해인 1866년부터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명성황후가 행방불명되었다가 환궁하기까지 궁중의 역사가 빠르게 장면이 바뀌면서 펼쳐졌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편이 되어 시아버지 대원군과 갈등을 빚는데, 대원군은 실권을 쥐고 있으면서 쇄국정책과 섭정을 계속 이어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개방이 대세라고 생각한 명성황후는 대원군을 견제한다. 1874년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고, 그해에 뒷날 순종이 될 왕자가 탄생한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등을 거치며 한반도 점령에 야심을 꾸고 있던 일본은 명성황후가 걸림돌이라며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한다.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비탄에 잠겨있는 온 백성에게 명성황후의 혼이 나타나 “백성이여 일어나라”는 곡을 부르는 대목이다. “어린 나이에 힘이 없어 부모님을 지키지 못하고 원수의 칼날에 떠나보내고… 착하고 순한 백성들이 이 땅을 어찌 지킬꼬, 한스러워라 조정의 세월…”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이태원(명성황후 역)의 호소력 넘치는 노래는 관객들에게 찡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2013년이 저물어가는 연말, 국채보상운동이란 항일운동의 역사를 가진 대구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명성황후는 개화기 서구열강에 휘둘리며 고통받는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되돌아보게 했다. 이 나라의 역사가 누구에게 어떻게 핍박받았는 지, 지도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 지도 생각하게 했다.
명성황후가 비명에 간지 118년이 지난 지금, 뮤지컬 `명성황후`는 어느 시대나 국민대통합의 역사가 꼭 필요하다는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