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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이어도 가

등록일 2013-12-10 02:01 게재일 2013-12-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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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형 시인·오천중 교사

이어도여, 너는 속았다! 여의도에게 너는 철저한 남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는 남이다, 이어도가 여의도에게 배신당하던 날 우리는 뭘 하고 있었던가. 비록 우리도 여의도에게 배신당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하는데, 우리는 지키지 못했다. 무감각할 대로 무감각해진 우리는 모든 것이 농지거리다. 누군가는 웃으면서 말한다. 유신이 부활했다고, 이런 말조차 종북이라고, 또 누군가는 이제 곧 왕정이 부활할 거라고. 아니 어느 곳에서는 절대 왕정이 부활했다고들 한다. 거역도 부정도, 심지어 항변도 못하는 말씀을 내리시는 절대 군주가 왕림하셨다고 한다.

누가 타임머신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놨는지, 이제 곧 우리에겐 삼국 시대를 지나 철기, 청동기, 신석기, 구석기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 어찌 반갑지 않은가.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우리는 곧 태초로 돌아가겠지. 차라리 어쩌면 그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그곳까지 들어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던, 위선과 가식이라는 말조차 아니 순수라는 말조차 없던 석가 전 시대, 아담과 이브 전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과연 그 때처럼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까? 답은 또 뻔하다. NEVER, NO WAY!

지금 우리 사회 창조의 키워드는 남이다. 이어도가 저렇게 수난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 남 탓이다. 이 나라에는 모두 남만 살고 있다. 교육 정책과 교육 현실이 남이고, (학생이 학교 밖에서 인간이 돼 오길 바라는) 교사와 학생이 남이고, 교사와 교사가 남이고, 학생과 학생이 남이고, 학부모와 교사가 남이고, 친구와 친구가 남이고, 가족이 남만 못하고, 여(與)와 야(野)는 남을 떠나 아예 원수이고, 남(南)과 북(北)이 남이고, 노()와 사(社)가 남이고, 자연과 인간은 더 남이고, 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신과 신이 남이고, 신과 성직자가 남이고, 성직자와 성직자가 남이고, 신과 신도가 남이고, 성직자와 신도가 남이고…., 이어도여 너와 관련된 모두가 남이다. 미안하다.

이어도여, 관계는 남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너에게 처음으로 고백한다. 너와 관련된 모든 것이 남이다. 네 살 길은 최대한 빨리 너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네 스스로 끊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여의도를 믿지 말고 홀로 네 홀라 살아가거라. 너를 찾아 떠난 이들의 그 마음으로 그들을 품에 안고 지금처럼 거대한 파도와 맞서 싸워라. 차라리 그게 너를 지킴에 있어, 너의 의미를 지킴에 있어, 너를 찾아 떠난 그 많은 사람과 그 사람들을 떠나보낸 이들의 마음을 지킴에 있어, 너를 아는 이 나라 모든 사람을 지킴에 있어 더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회에서 관계는 남의 다른 말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남이다. 그 옛날 그 숭고한 “내 탓이오!”는 다 어디로 갔는지. 지역과 지역이 남이고, 계층과 계층이 남이고, 세대와 세대가 남인 세상에 이어도 너를 지킬 주체는 어디에도 없다.

여의도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이어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어도가 누구의 땅인지, 또 이어도가 어떤 곳인지? 이어도의 국내 해양학계의 공식 명칭은 무엇인지? 여의도여 답을 하려무나! 혹 문충성 시인의 말이 들리기나 하는가!

“한라산을 등에 지고 제주 / 바다와 마주 서 보라 (…) / 수평선 넘어 꿈길을 열라, 썰물 나건 돛단배 한 척 / 이어 사나 이어도 사나 / 별빛 밝혀 노 저어 가자 / 별빛 속으로 배 저어 가자 (문충성 `이어도`중)

이러다 동경 132, 북위37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일곱 살 나경이의 노래 소리를 여의도는 듣는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동경 백삼십이 북위 삼십칠….,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우리 땅!” 들리는가 여의도여.

이제 우리 다시 시작하자. 모든 것은 내 탓이다 운동을. 내 탓이오! 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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