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제 실력이면 이젠 복수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B:아니다. 넌 아직 멀었다./ A:벌써 5년입니다. 대체 얼마나…/ B:네가 복수를 하는 날은 네 마음 속 칼을 내려놓는 날이니라”
`오늘의 명상카툰 31:진정한 복수는 용서`에 나온 내용이다. 이 카툰을 보며 5년이 아니라 27년간 감옥에서 맘에 칼을 품었을 법한 넬슨 만델라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을 박해한 적을 용서하는 `진정한 거인의 풍모`를 보여줬다. 만델라는 흑백합의로 이뤄진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선출돼,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무지개국가`를 슬로건으로 삼고 `화해의 정치`를 실현했다. 흑인에게 심한 탄압과 테러를 자행한 이들에게도 진실화해위원회에 출두해 자신이 한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19세 때 만델라의 리더십을 접한 것을 계기로 정치참여를 결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포스트 만델라`시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은 어떨까? 정치·사회 통합의 구심점이었던 만델라의 부재와 장기 집권하는 여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부정·부패가 정국 불안요인이라고 전해진다. 상위 10%는 갈수록 부유해지고 하위 50%는 하루 2달러로 생계를 연명하는 빈부격차에 따른 양극화에다 흑백갈등이 지뢰의 뇌관이 될 거라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면 2013대한민국호(號)는 어떠한가? 만델라처럼 `화해의 정치`로 국민대통합과 상생을 실현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정치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를 앞에 두고도 한반도는 둘로 갈라져 있고, 빈부격차에 따른 양극화와 이념갈등으로 우리 내부의 의식마저 둘로 쪼개져 있다. 남북갈등과 남남갈등이 난마(麻)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갈등`과 `이중적 분단`의 현실에 지친 국민들은 각자도생하고 있는 형편이란 걸 아시는지.
2013대한민국號에 승선한 젊은이들은`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화되자 서서히 `자발적 잉여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대중문화코드가 되어 영화도 만들어졌고 잡지까지도 만들어졌다. 40대 중년들은 점점 더 `왜소한 인간`이 되어가는 자신에게 놀란다. 이들은 그래도 공동체의식이 살아있었던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위안을 얻고자 한다. 복고 바람을 타고 재상영하는 1980~90년대 영화에 빠져들고 그 시절 음악에 젖어든다. 세대를 뛰어넘어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문화현상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러한 제반 현상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2012년 12월19일 대선을 치른 지 1년이 다 된 2013대한민국호(號)는 아직도 대선정국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前 대선후보가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 출판기념회로 안철수 의원의 신당창당 준비에 맞불을 놓으면서, `응답하라 2012`가 상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쯤에서 `우리시대의 사상가이자 경세가`인 박세일과 김종인을 떠올린다. 사회학자 김호기는 박세일의 선진화론은 세계화시대의 신성장 패러다임 구축에 주력하고,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론은 민주화 이후의 시장-국가 관계의 균형을 강조한다고 했다. 선진화론은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건 `선진일류국가`의 토대가 됐고, 경제민주화론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내건 `국민행복시대`의 핵심이 됐다.
그런데 선진화론은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어떤 길을 걸었나? 경제민주화론은 박근혜 정부 1년 동안 어떤 길을 걷고 있나? 이 2개의 생산적 담론은 결국 유사한 운명이 되고 마는 것인가? 사상가이자 경세가인 김종인이 여당을 떠난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경제민주화론만큼은 `결국 선거용이었네`란 의심을 받지 않고, 박근혜 정부의 남은 4년 동안 찬찬히 실현돼 `국민행복시대`를 여는데 일조했으면 좋겠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세계화시대의 신성장 패러다임 구축에 주력하는 박세일의 선진화론이 박근혜 정부와 조응하면 어땠을까?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론은 차기 정부와 조응하면 여러 여건상 더 잘 굴러가지 않았을까? 한가지에만 집중하기도 벅찬데 2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현 정부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내심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정치권이 각자도생하고 있는 국민을 끝끝내 외면할까봐 염려가 되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