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영화 중에 큰 상을 받아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피에타`다. `피에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로서는 아주 이례적인데 그것은 세상의 그로테스크를 그리는 감독이 이 영화에서는 그로테스크 이상의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이한 것,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이상한가. 불합리한 것 투성이다. 노력해도 결실이 따르지 않고 왕후장상은 따로 타고 난다는 이치도 옛날과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나는 그런 인간 삶의 기이한 국면들을 그리는 김기덕의 영화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만큼 구제와 구원의 전망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어 왔다.
그런데 `피에타`는 달랐다. 이 영화는 철공장 지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철공장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이고 자본이다. 철공장지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대세계의 냉정한 운영 논리를 대표한다. 이런 상징적 지시 작용을 통해 피에타는 이전의 김기덕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보편적 전달력을 확보했다.
피에타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지극한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철공장 지대에서 빌려준 돈을 추심하는 심부름으로 남을 죽게 만든 젊은이의 비정한 심정세계에 어떻게 사랑이라는 따뜻한 피가 돌도록 할 것인가?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조민수는 자신을 그 젊은이의 어머니라 믿도록 만들고, 그 어머니 `된` 자기의 죽음을 체험하도록 함으로써, 얼어붙은 젊은이의 마음에 슬픔의 싹이 돋아 나무가 되어 잎이 나도록 한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세상이 따뜻해질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남도 자기처럼 슬플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그리하여 남의 고난과 고통에 자기 자신도 감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은 영화다. 그러고 나서 최근에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읽었다. 거기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전기소설 중에 `남염부주지`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여기가 철과 구리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 작품에 나오는 나라는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 없다. 모래도 자갈도 없다. 있는 것은 철과 구리뿐인데, 그것이 모두 녹아 끈적끈적하게 흘러 넘친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살 수 없는 곳인데, 하지만 그곳이 바로 지옥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살갗이 다 타버리고 뼈가 녹아도 다시 살아나 고통을 반복하며 살아가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이 남염부주지의 세상이 바로 김기덕 영화 `피에타`의 철공장 세상이다. 김시습은 그 수백 년 전에 지금의 영화감독이 배경으로 내세운 철과 구리의 세상을 제시했던 것이다. 참으로 감탄스러운 일이다.
생각해 보면, 뜨거운 여름과 싸늘한 겨울의 쇠는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가. 이 쇠와 구리의 세상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용광로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흘러나오는 쇳물은 얼마나 뜨거운가. 이 뜨거움을 식혀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이냐.
지금껏 말해왔듯이 그것은 타인의 고통에 자기 자신도 아파할 수 있는 마음,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이다. 그러니 세상은 슬픔이 넘치도록 흘러야 살 만 한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이 넘치게 하지 말고 슬픔이 넘치게 하라. 이 흐름이 세상을 구제, 또 구원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