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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절망 너머 회복의 풍경들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11-29 02:01 게재일 2013-11-29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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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165쪽

인간 삶의 고독과 비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진실과 본질적인 정서들을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새겨온 한강이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에 단편이 당선돼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올해로 등단 20년차인 한강은 그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이번 시집을 묶었다.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의 시편 제목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조가 충분히 감지되는 한강의 시집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존재와 언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말과 동거”하는 숙명을 안은 채 “고통과 절망의 응시 속에서 반짝이는 깨어 있는 언어-영혼”(문학평론가 조연정)을 발견해가는 시적 화자의 환희와 경이의 순간이 빛-무늬처럼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염된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부스러질 것들//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무엇인가/반짝인다” (`저녁의 소묘 4`)

“늦은 오후에서 한밤으로 건너가는 시간(저녁), 다시 한밤에서 날이 새기 직전의 시공간(새벽)에 주로 깨어 있는 시인은 “부서진 입술//어둠 속의 혀”로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피 흐르는 눈 3`) 한다.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피 흐르는 눈 4`)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끈적끈적한 것/비통한 것까지/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해부극장 2`)

마르고 텅 비어가는 그 육체는 영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지(同志)이기에 결국 영혼도 부서지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과 균열의 느낌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시인

그러나 시인은 이런 상실감과 슬픔에 앞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과 정면승부를 한다. 스스로에게 재우쳐 다짐하듯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오하다. 짐작건대 그가, 시집의 5부(`캄캄한 불빛의 집`)에 실린, 대부분 시인의 20대에 씌어진 시들에서 목도할 수 있는 벅찬 숨결, 더운 핏줄, 열정적 사랑, 푸릇한 청춘의 시절을 통과해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아아 첫 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첫 새벽`)

이제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조용한 저녁이 흘러”(`저녁의 소묘 3`)들 때, 어둠 속에서 건너가보는 꿈속에서, 거울 저편의 정오나 혹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에서 “동그랗게 뒷걸음질 치는”(`심장이라는 사물`) 혀를 이용해 시인이 닿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 삶의 본질, 고통과 절망 너머의 어떤 절실함과 회복의 풍경들이다.

“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회복기의 노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에 가닿고자 한다. 이 시집은 그간 한강 문학을 이야기할 때 언급돼온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장들 너머에 자리한 어떤 내밀한 기원-성소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는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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