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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화가 이쾌대 탄생 100주년의 의미

등록일 2013-11-27 02:01 게재일 2013-11-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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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월북화가 이쾌대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가며 그가 일궈낸 독창적인 작품세계는 서양미술 도입기라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확고한 작가관으로 완성도 높은 화면구성과 시대의 아픔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는 진지함이 함께 어우러져 독창적 화풍을 이뤘다는 점이다. 올해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화가이며 20세기 한반도 이데올로기의 최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쾌대가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13년 경북 칠곡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정치적 혼돈 속에서 당시 지식인이 가져야 했던 진정한 삶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또 다른 우리시대의 아픔을 만들어 내었다.

1988년 10월 월·납북 예술인들에 대한 정부의 해금조치가 이뤄지고 3년이 지난 1991년 10월 국내 미술계에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다. 정전 35년 동안 우리화단에서 잊고 있던 화가 이쾌대의 작품전이 유족들에 의해 개최됐기 때문이다.

`월북화가 이쾌대전`이라는 타이틀로 마련된 그의 유작전에는 그동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해방공간 미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그의 주옥같은 작품 50여점이 소개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렸던 한국현대미술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확인해 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월북화가 이쾌대의 작품은 진한 울림을 전해 주는 한편의 장편소설과도 같았다. 그 울림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나 그 자신을 둘러싼 신화적 세계 속의 위대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어온 삶과 그려낸 세계가 우리들에게 까맣게 잊고 지내온 혼돈의 역사 속 한부분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줬다. 해방공간이라는 짧은 기간, 그렇지만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격동적인 삶의 현장들을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일부나마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스케일과 구도는 오히려 낯설 정도로 생소한 충격을 우리에게 전해 줬다. 마치 유럽 고전주의 역사화를 보는듯한 서사적 이미지와 관객에게 전해주는 강한 조형성은 그동안 목가적 향토주의와 아카데믹한 시각에 젖어있던 관점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쾌대는 1921년 칠곡 신동소학교에 입학했다 2년 뒤 대구 수창보통학교로 전학해 대구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천재소년화가 이인성과 함께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이들 둘은 결국 수창보통학교 동기동창 인 셈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이인성과의 이렇다 할 교우관계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1928년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하면서 미술과 본격적으로 친숙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영향은 1학년 때 담임이자 미술선생이던 화가 장발의 적극적인 권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1933년 동경제국미술학교 유학시절 한국인 유학생 화가들로 구성된 백우회와 재동경미술협회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결성했던 좌익단체들의 참여와 함께 제작되어진 다양한 작품들은 그 시대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북한으로 선택은 우리 미술사의 또 다른 아픔의 시작이었다.

1912년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이어 이쾌대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대한 기대는 비단 필자만의 바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유작 대부분을 소장하고 있는 유족의 사정으로 인해 서울전시는 물론 고향인 대구에서 그의 작품을 재조명해 보는 기회는 모두 사라져 버려 아쉬움을 더 해 줬다.

지난여름 대구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학술대회가 열려 그나마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비록 그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예술가가 가져야 했던 철학과 삶을 천천히 돌이켜 보는 공간과 시간은 분명 다시 이루어져야 할 우리들의 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그의 작품 속에는 풀지 못한 시대의 아픔과 수수께끼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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