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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등록일 2013-11-21 02:01 게재일 2013-11-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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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욱 시인

독일 속담에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말이 있다. 사랑이나 인정은 물과 같아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는 쉬워도 역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하는 것이리라.

“은유, 내가 봐주마. 너희 둘이 열심히 벌어서 빨리 일어서기나 해라” 엄마는 기꺼이 손녀를 돌보겠다고 했다. 옛말에 “애 볼래? 밭맬래?” 하면 밭매러 간다고 할 정도로 육아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처음에는 어린이집에 맡길 생각이었지만 연일 터져 나오는 아동학대 뉴스도 그렇고 무엇보다 은유가 너무 어렸다. 환갑이 다된 엄마에게 은유를 맡기자니 마음이 무척 아렸다. 스무 살에 시집와 자식 셋 뒷바라지도 모자라 여동생 손주, 손녀도 돌봐주셨는데 이제 나까지 엄마에게 멍에를 지우게 됐으니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싶었다.

죄송한 마음에 틈날 때마다 갖가지 먹거리를 사 들고 들어갔다. 많지는 않지만 매달 용돈도 드렸고 안부 전화도 빼먹지 않았다.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한 나름의 치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손녀 봐주는 통에 요즘 내가 효도를 다 받는구나!” 엄마의 그 말이 우레처럼 가슴에서 울렸다. 그랬다. 사실은 엄마를 위한 게 아니라 은유를 위해서였다. 부끄럽지만, 아프지만, 그랬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대단했다. 생전에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며 어르신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2013년 여름은 사람들에게 가장 뜨거웠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그 와중에도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가셨다. 온종일 뙤약볕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돌아온 아버지의 검붉은 목덜미를 보노라면 그렇게 애잔할 수가 없다. 이제 연세도 있고 하니 그만 쉬시라고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너거한테 손 벌리고 싶지 않다. 일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할 끼다”

전국학생 주산경연대회에 군 대표로 나가 상을 받아 올 정도로 영민했던 아버지의 운명은 1959년 9월17일 추석 아침,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 `사라`로 완전히 뒤바꿨다. 태풍 `사라`는 지금까지도 한반도에 상륙한 가장 강력한 태풍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망자가 849명, 실종자가 206명에 이를 정도로 그 피해는 막대했다. 실종자 206명 중의 한 명이 바로 할아버지였다. 태풍 `사라`는 할아버지의 시신도 돌려주지 않았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가혹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개가하면서 삼촌 집에 얹혀살게 된 아버지는 그때부터 줄곧 눈칫밥을 먹으며 머슴처럼 살았다. 어릴 때부터 얼마나 지게질을 했던지 지금도 어깨에 그 자국이 남아있다.

그때 태풍 `사라`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삶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태풍 `사라`가 아버지의 운명을 잔인하게 짓밟았다고 나는 믿었다. 적어도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기 전까지는.

요즘 들어 부쩍 기력이 쇠하신 거 같아 아버지를 모시고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가 진맥하더니 “이제 몸 쓰는 일은 그만 하세요. 몸이 많이 상했어요”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껄껄껄 웃으시더니 대꾸했다. “내가 다른 복은 없어도 일복 하나는 타고났소. 거기다 내 이름이 목숨 명에 목숨 수자 아니요. 질긴 목숨에 일복 하나는 타고났으니 내 한 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부지런히 벌어야지요. 안 글소?”

태풍 `사라`가 아버지의 운명을 바꿔놨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자신만의 운명을 당당히 개척해온 것이다. 하지만 환갑을 넘기고도 “너거한테 손 벌리고 싶지 않다”며 매일 새벽, 일터로 나가시는 아버지의 그 말이 참으로 아프게, 아리게, 쓸쓸하게 내 가슴에 와 메아리친다.

정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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