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포항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몇 명이서 경상북도수목원에서부터 보경사까지 약 12㎞에 달하는 내연산 계곡을 답사했다. 고문헌에 기록된 내연산의 명소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특히 지금까지 의문에 휩싸여 있었던 삼동석(三動石)을 확인하는 데 관심이 집중돼 있었다. 경북 동해안 최고의 명산인 내연산에는 명소가 많다. 지금도 내연산 12폭포와 보경사, 주변의 승경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많은 나그네들이 탐승한 명승지였다. 연산폭포 주변 바위에 새겨진 인물들을 조사해 보면 순사(巡使)로 왔다가 이곳에 오른 추사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 좌의정을 지낸 이은, 청하에 귀양살이를 한 부제학 유숙 등 거물급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이 뿐만 아니라 경상도관찰사를 비롯한 지방의 관리들도 출장 왔다가 혹은 유람삼아 이곳을 다녀갔다. 청하현감을 지낸 진경산수화의 거장 겸재 정선도 이곳에 자신의 이름 두 자를 새기고 폭포 주변의 아름다움을 4점의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조선 중엽에 편찬된 문헌을 보면 내연산의 랜드마크는 삼동석(三動石)이었던 것 같다. 1530년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내연산을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크고 작은 세 개의 바위가 솥발(鼎足)처럼 벌려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이라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양손으로 밀면 꿈쩍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내연산의 명물은 지금과 같은 폭포가 아니라 삼동석임을 짐작할 수 있다. 1861년에 만든 김정호의`대동여지도`에도 내연산에 삼동석이 표시돼 있다. 하지만 이후의 문헌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희미해져 구체적 위치를 비정하지 못한 채 그냥 삼동석이 있다는 정도만 제시했다. 이 지역의 향토사 연구자들조차 그 실체를 의심케 하는 의문의 바위였다. 최근에 향토사학자인 김희준 교사가 `내연산 명소와 보경사 암자의 연혁`(동대해문화연구 13집)이란 논문을 통해 삼동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비정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삼동석의 위치를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 문헌은 황여일의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1587)과 유숙의 `취흘집(醉吃集)`(1623~1636)이다. 황여일은 “삼동석은 용추 상류 20리 지점에 있는 깊은 못인 주연(舟淵)에서 다시 10리 상류에 있으며 그 아래에 승암(僧庵) 두 곳이 있다”고 하는 보경사 승려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
삼동석 현장을 실제로 답사하고 이를 자세히 기록한 사람은 유숙이었다. 유숙은 1625년 10월경에 이곳을 답사했다. 삼동석은 상하로 솥발처럼 생겼다고 했다. 그는 보경사로 들어가는 길 대신 청하의 호학산(呼鶴山)을 넘어서 삼동석에 접근하는 길을 택했다. 유숙은 삼동석 아래에 두 절이 있고, 주변에 두 벼랑이 높이 솟아 있다고 했다. 암자는 단풍숲가에 있다고 하고 암자 앞 지척에 봉우리가 있다 하는 등 이 바위의 형태와 입지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동석암(動石庵)이라는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는 1636년 3월에 청하현감 심동구와 다시 이곳을 찾을 정도로 삼동석에 대해 애착이 많았다.
황여일과 유숙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삼동석은 삼용추(三龍湫) 위쪽 약 30리 지점에 있고, 상하로 솥의 발처럼 생겼고, 근처에 동석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선바위(立巖)를 삼동석으로 비정할 수 있었다. 현재 선바위 맞은편 언덕에는 암자터가 있다. 이번 답사를 통해 향토사 연구자들은 김희준 교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찾아낸 선바위가 삼동석임을 확인하는 한편 주연(舟淵)도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포항시에서는 내년부터 내연산 진경산수 발현지 조성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탐방로 정비와 함께 안내판 설치, 스토리텔링 등의 사업을 벌일텐데, 이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명소들에 대한 이러한 고증작업이 선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