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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법

등록일 2013-11-07 02:01 게재일 2013-11-07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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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다. 동물로 치면 톰슨 가젤은 풀을 뜯어 먹고 사자는 버팔로를 사냥하고 하이에나는 사자가 남긴 것을 먹거나 집단으로 사자한테 뺏어 먹고 살아간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다 유전자가 시킨 일이니 사자라 해서 탓할 일이 아니요 하이에나라 해서 나무랄 일이 아니다.

사람은 어떤가. 어떤 사람은 초등학교부터 대학 나올 때까지 노심초사하면서 하루 하루 주어진 과제에 최선을 다해도 항상 입에 풀칠이요,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 중학교 건성 건성 다녀도 호주머니에 돈을 기백만원씩 넣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아예 학교라고는 겨우 졸업장 받앗을까 일찍부터 일선에 뛰어들어 공사판 일하다 건축에 눈 뜨고, 단란주점 웨이터를 하다 술집을 해서 돈을 벌고 또 그 돈을 흥청망청 쓰다 불경기를 잘못 만나 부도를 내고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서울 근방에 신도시가 많은데 그중에 일산이라고 있어 1980년대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곳이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어 거기 집 하나라도 가진 사람은 그래도 살 만하다는 세상이 되었는데, 정작 그 땅이 때를 만나 도시계획에 따라 땅을 `불하`받아 시행사를 하고 돈을 굴리면서 꽤나 큰 손 행세를 하던 사람도 인생살이의 유전을 견디지 못해 이제는 남의 회사 자가용에 운전을 해주며 살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방법들을 향해 함부로 탓할 일이 아닌 것은 이 인간이라는 것이 참 묘해서 어떤 인간은 물질적으로만은 절대 살지 못해 멀쩡한 시간을 참선을 하고 요가를 하고 기 수련을 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하루 풀칠의 업이 무겁디 무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변화무쌍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인생을 저윽이나 풍운아처럼 헤쳐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또 얼마나 기이하고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냐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느냐 생각한다.

대저 남의 말을 들어주는 위치에 있지 않고 자기 얘기를 들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속되게 표현하여 을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식과 담론의 세계에도 확실한 태도라는 것이 필요해서, 누군가 이쪽이냐 저쪽이냐하고 물을 때 나는 이렇소, 라고 간단히,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갑이다. 지식이나 담론 세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이 세계의 어느 진영에 안전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식인은 당신은 누구냐 하고 물을 때 답을 하기 어렵다. 누구 편이냐 하면 답을 구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이청준 소설에 단골로 나오는 얘기중에 전짓불 앞의 방백이라는 것이 있다. 옛날 6·25 때 밤에 캄캄한 곳에 숨어 있는데 갑자기 전짓불이 자기를 비춘다. 전짓불을 든 사람은 보이지 않고 자기만 그 불빛 아래 표정이 다 드러난다.

너는 누구냐.

국군 편이냐, 인민군 편이냐.

그때 대답을 자칫 잘못 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이와 같을 때 지식인 노릇 하기는 아주 힘들다. 사는 방법에는 여러 길이 있으나 이와 같이 살지 않고 저와 같이 사는 알리바이를 제대로 제시하기도 힘들다.

사람의 삶이 외줄타기처럼 힘들어지면 사람은 착해지게 마련이다. 수구초심이라 하지 않던가. 육신의 배고픔을 채우는 일도,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모두 힘든 때다. 사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

다들 안녕하시라. 외로워들 마시라. 누구나 애쓰고 있더이다. 오늘만 그러하지 않았더이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아비와 아들이 손을 맞잡고 웃고 딸이 어미를 위해 밥을 지을 때가 오리다.

가을이 깊으면 겨울이 오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봄이 또 오오. 저마다 능히 사는 기예를 익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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