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업을 위해 찾은 학교 교정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숫길을 지나면서 묘한 기분을 느껴 보았다. 2주전이 때 마침, 중간고사 시험기간이라 보름 만에 찾은 탓 인지, 그동안 은행나무들은 그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짙은 향수를 자아내는 색감으로 탈바꿈 해 있었다. 눈부신 햇빛에 반사돼 찬란한 황금빛으로 장관을 이룬 나무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스무 살 청년시절에 바라보았던 은행나무는 크고 화려하게만 보였고, 서른에 본 노란 은행나무숲에서는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여인이 걸어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거닐 것만 같은 설레임으로 가득 했었다. 하지만 마흔이 한참이나 지난 오늘 바라보는 은행나무는 그저 바라만 봐도 마냥 좋은 존재가 되었다. 노랗게 물든 커다란 은행나무가 그곳에 있어 좋고 난 그 은행나무 숲은 거닐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옛 추억을 떠 올릴 수 있어 좋은 것,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기에 더없이 좋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로맨틱한 가을을 뒤로 하며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나? 괜히 스잘때 없는 곳에 기분을 빠뜨리는 것 같아…”혼자 말을 중얼거린다.
지난달 29일부터 대구의 비평가들이 주축이 된 모임에서 `퇴근길 인문학`이라는 강의를 시작했다. `대구 근대와 현대의 만남`이라는 부제로 진행되는 이번 무료강좌에는 대구근대기의 인물과 장소 그리고 사건들에 대한 의미와 역사를 이야기 나누듯 풀어낸다. 그리고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과거를 현대와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도 화려한 치장이나 가식 없이 소박하게 진행된다. 퇴근길이 막히면 늦게 와도 좋고, 강의를 듣는 이들이 적으면 편안한 기분으로, 때론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찾는 이가 많으면 서서도 듣고, 끼어 앉아서도 들으며 넉넉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만드는 시간이다. 국가의 중요한 국정을 논하는 엄중한 자리도 아니며, 자기주장이나 누구를 비방하는 목소리로 강의실이 시끌벅적한 장소도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동네의 옛 이야기와 우리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조용조용 담아내고 있다. 인문학을 함께하는 공간 역시 딱딱한 책상이 놓인 강의실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 2층 건물에서 진행함으로써 편안함을 더해준다. 불과 6~70여년전만 하더라도 대구에서 가장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했던 번화가가, 이제 오후 6시만 되면 불 꺼진 할렘가로 변해버리는 `북성로`에 대한 과거와 오늘의 이야기들을 한다.
과거에는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여겨졌던 노오란 은행나무가 어느 순간 매년 피어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 주듯하다. 세상을 모두 다 안 것처럼 살아왔던 세월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나하나 느껴 보는 것이 진정한 인문학의 재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과거 학문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을 습득해 이를 산업발전의 에너지로 사용했다면 이제는 풍부해진 지식을 응용해 창의적이고 도전적 미래를 바꿔 나가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주입식에서 벗어나 세상사는 이치를 이해하고 인간의 삶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연구하는 인문학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제 가을이 점점 깊어 가고 있다. 그동안 책장 속에 꽂혀있던 시집을 펼쳐 이 세상의 사람 냄새를 한번 쯤 맡아 보는 것도 만추 가을을 즐기는 또 다른 기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