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와 드라마에 유독 딸바보 아빠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소원`에는 성폭행을 당한 딸아이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는 아빠가 등장한다.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아빠마저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딸의 마음을 조금씩 여는 아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에서 아빠는 가족에게 무심하게 살아왔던 것을 참회하듯 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
최근 종영한 MBC 드라마 `투윅스`에서도 아빠 장태산(이준기)은 삶에 아무런 의미조차 갖지 못한 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딸 수진(이채미)이 백혈병을 앓고 있고, 그녀에게 골수를 기증할 유일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는 삶에 대한 태도가 절실해진다.
딸바보 아빠 얘기라면 올해 초 개봉해 1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은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빠뜨릴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딸 예승(갈소원)이에 대한 무한사랑을 보여주는 딸바보 용구(류승룡)는 말만`바보`가 아닌 실제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바보다. 대놓고 딸바보 이야기를 기획한 영화인 셈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아빠 어디가`의 송중국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추성훈은 서슴없이 자신들이 딸바보임을 인정하곤 한다. 마치 세상의 아빠치고 딸바보 아닌 이들이 없는 것처럼…. 이들은 왜 이렇게 스스로를 딸바보로 내세우는 것일까.
남 얘기할 것도 없다. 사실 집에 가면 나 자신도 딸바보로 불리기 때문이다. 지난 1일 대구 수성아트피아에서 열린 대구MBC창사 50주년 기념 가을음악회에 큰 딸인 김봄소리가 대구MBC 교향악단과 함께 브람스 바이올린협주곡을 연주했다. 만 5세의 어린 나이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한 큰 딸은 놀라운 음악적 재능과 특유의 성실함으로 연주자의 길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연주자로서는 엘리트 코스인 서울 예원학교를 거쳐 서울예고,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데다 서울대 음대대학원을 다니면서 세계유수의 국제콩쿨을 차례로 석권하고 있으니 참으로 장한 딸이다. 차이나국제콩쿨과 60여년 역사를 가진 뮌헨ARD콩쿨, 일본센다이콩쿨, 시벨리우스콩쿨, 독일 하노버콩쿨 등 세계유수의 국제음악콩쿨에 출전하기만 하면 결선에서 우승하거나 입상하는 괴력을 보여 최근 `클래식계에서 가장 핫한 연주자`로 꼽히는 큰딸 얘기만 나오면 나도 모르게 거품을 물다가 `딸바보`소리를 듣고 만다. 연주 당일 저녁에도 교향악단 지휘자를 비롯한 단원들과 함께 뒤풀이를 마친 딸이 전화한 시각이 자정이 넘었는 데도 불구하고 군소리 한마디 없이 딸을 태우러 나가는 내 모습에 아내는 내 머리 뒤꼭지로 `딸바보`소리를 날렸다.
과거에 권위적인 모습을 보였던 아빠들이 어느새 딸바보로 변신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영화와 드라마에 나오는 딸바보 아빠들은 모두 딸에게 상처를 준 데 대해 용서를 구하는 모습들이기에 가족에 대해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IMF를 겪으며 직장이나 사업에서 타격을 입은 아빠들의 권위가 크게 꺾여 가족내 아빠가 차지하는 입지가 좁아지면서 아빠들 스스로 가족에 편입되고자 하는 욕구를 보이고 있는 현상이 란 분석도 있다. 즉, 아내에 대해 지나치게 잘해주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지만 딸이라면 바보처럼 살갑게 굴어도 그리 눈총받지 않고 훨씬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집 밖에 딸을 내놓기 겁날 만큼 성폭행이나 납치사건이 빈발하는 사회분위기도 딸바보 아빠들을 자극한다. 어른들이 만든 불안한 사회는 아빠들에게 또 하나의 죄의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우리 사회 어디서건 쉽게 만날수 있게 된 딸바보 아빠들. 이들은 어떻게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머니머신`아빠들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