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 깊은 상처 아물어/ 생살 돋을 때까지/ 제 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지// 바위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으로 울음 울어/ 불길 잡힐 때까지/ 거인이 앉았던 자리에 가득한 고요 때문이지”
김삼환 시조 시인의 `거인의 자리` 전문이다. 일상에서 소소한 일들로 일희일비하고 불안에 떠는 소인과는 다른 풍모는 `거인이 앉았던 자리에 가득한 고요`로 표출된다. 그 고요에 다다를 때까지 얼마나 생살 돋을 때까지 제 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고 속울음을 울었을까?
`거인의 풍모`를 유지하며 살기엔 우리네 일상이 참말로 팍팍하고 힘에 부친다. 이 땅의 범부들에겐 `이건희처럼 생각하고 정몽구처럼 행동하라`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윗사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예스맨`이 돼야 하고 부지런히 학연·지연·혈연을 찾아 연줄을 만드는 `스파이더맨`도 돼야 한다. 자기PR시대를 사는 만큼 생색내고 자기과시에 열심을 내는 `화학비료형 인간`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들은 자리가 좀 높아지면 자율과 창의성보다 형식에 사로잡히기 쉬운`관료형 인간`으로 변신한다.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소인에 가까운 형상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예스맨`, `화학비료형 인간`, `관료형 인간`의 공통점을 “능숙한 말솜씨로 여러 가지를 말하는데 대개 1인칭이 아니라 3인칭 화법을 즐겨 쓴다는 점”이라고 했다. 참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이사야 벌린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안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여우 형과 고슴도치 형으로 나눴다. 여우 형은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복잡한 면면들을 두루 살핀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하질 못한다고 벌린은 말한다. 반면에 고슴도치 형은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단 하나의 체계적인 개념이나 기본 원리로 단순화한다. 모든 딜레마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게 축소시킨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는 좋은 회사를 위대한 회사로 도약시킨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모두 고슴도치 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슴도치 속성을 활용해 자신의 회사에서 `고슴도치 컨셉`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관되게 추진했다고 한다. 비교 기업의 리더들은 여우와 같은 속성이 있어 `고슴도치 컨셉`의 분명한 장점을 파악하지 못해서 어지럽고 방만하고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짐 콜린스는 후속 작인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왜 어떤 기업은 위대한 기업으로 건재한 반면, 다른 기업은 시장에서 사라지고 몰락하는가? 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몰락의 5단계를 소개하고 나서 몰락의 전조를 조기에 감지할 수 있으므로 몰락은 피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부록에 보면 몰락에서 회복한 사례로 IBM을 소개한다. IBM은`고슴도치 컨셉`을 기술통합서비스에 적용하고 핵심가치의 보존과 아울러 변화를 추구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돌고 돌아왔으니 질문을 던진 후 조심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하련다. 정치·경제·외교·안보·사회 문제가 마구 뒤엉켜 있는 정국의 판을 뒤엎고, 새 판을 짜보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정치에서도 박 대통령이 `거인의 풍모`를 유지하며 야당과의 대화에서 통큰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 주변에`불편한 진실`을 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이야기하는`소신파`도 가까이 두어야 한다. 그 다음에 복잡한 정국 현안들에서 핵심가치만 추려 문제를 단순화한 후, 그 `고슴도치 컨셉`을 끝까지 움켜쥐고 광적일 만큼 끈기 있게 임기 말까지 실천해 나가야만 한다.
자꾸 1997년과 2013년 현재의 경제상황을 비교하고 분석하게 되는 건 왜인가? 자주 영·일동맹으로 러시아를 견제했던 20세기 초 동북아 정세와 미·일동맹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현재의 동북아 정세를 대비하게 되는 건 또 왜인가? 대통령과 여야지도자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말로 심각한 `국가적 현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진짜 시간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