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가을이다. 지난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살인적인 폭염의 기억이 아직 몸에 남아있는데 언젠가 싶게 강원도 산간에 첫 서리가 내렸다는 일기뉴스를 들으면서 일상에서 여름의 흔적이 하나둘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가을인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몇 날을 보내는데 벌써 아침, 저녁은 몸에 한기를 느끼면서 가을 정취를 맛보기도 전에 겨울로 건너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가 좋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뚜렷한 사계절 때문이기도 하다. 하기야 요즈음은 봄과 가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여름과 겨울로 곧장 접어들어 옛날 사계절의 정취를 경험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서 사계절의 축복을 누리는 복 받은 나라라는 사실이다.
인생도 그렇다. 봄 같은 유년기를 지나 여름 같은 왕성한 청년기를 지나 가을 같은 성숙한 장년기를 넘어 겨울 같은 인생의 황혼기, 노년기를 맞으면서 일생을 보낸다. 그래서 씨 뿌림의 유년기나, 가꿈의 청년기나, 거둠의 장년기나, 누림의 노년기는 인생의 사계절이. 그 어느 계절도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다. 씨 뿌림이 없으면 인생 말년의 누림은 기대할 수 없다. 아무리 씨를 잘 뿌려도 가꿈이 없으면 가을의 거둠이 없다. 거둠이 없는 노년이 어찌 누림의 은총이 있겠는가? 그래서 시편 92편 14절에서는 인생의 멋진 노년을“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라고 표현했다. 이 축복을 누리기 위하여 시편 기자는 씨 뿌림과 가꿈의 계절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13절에서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라고 고백을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 여정의 노래다.
지난달 25일 소설가 최인호씨가 암과 싸우다 인생의 겨울을 맞았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68세의 나이로 주님 품에 안겼다. 풍랑이 일어나는 인생바다를 항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소설을 통해 전했던 최인호씨는 삶을 통찰하는 혜안과 사람을 향한 애정을 글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낸 분이었다. 비록 68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봄의 씨 뿌림과 여름의 가꿈은 비록 짧지만 그 누구도 우러러보는 거둠의 가을을 누리고 겨울을 맞이했다. 그의 가을은 짧았지만 암과 싸우면서 손톱이 빠진 손가락에 골무를 끼워가면서 글을 쓰기까지 자기 인생의 가을을 아름답고 붉게 물들였다.
그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교복 차림으로 신춘문예 시상식에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고, 최초로 책 표지에 얼굴 사진을 실은 소설가였으며, 출간하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된 최초의 작가였다. 가장 많은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모든 이력은 그가 온몸으로 생을 살아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엘리는 두 아들의 씨 뿌림의 계절을 그냥 훌쩍 뛰어넘게 하여 가꿈의 계절도 못 넘기고 차가운 생의 겨울을 맞이하게 했고 사울왕은 씨 뿌림의 계절을 잘 보내었지만 가꿈의 계절을 허망하게 보내고 거둠의 계절에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고 훌쩍 뛰어넘어 매서운 인생의 겨울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무엘과 다윗은 씨 뿌림의 계절을 잘 보내고, 가꿈과 거둠의 계절을 지나 인생의 겨울을 멋지게 누리고 하나님께로 갔다.
이 가을에….
나는, 우리는 무엇을 물들이고 있는가?
자연은 온 산천을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면서 거둠의 계절을 뽐내는데 나의 가을은 어떤가? 이 가을에 영혼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묵상과 경건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가을과 함께 영글어가는 축복을 연주하기를 소망한다.